경주에는 남산(南山)도 있고 낭산(狼山)도 있다

 낭산의 유적지를 찾아서

 

 

 

 

경주의 남산(南山)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도, 경주에 낭산(狼山)이라는 산이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경주 남산에 탑과 불상, 절터, 왕릉 등의 유적들이 많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어 주말이면 수백명의 등산객이 남산의 골짜기를 누비고 있어도, 낭산을 찾는 관광객의 숫자는 손꼽을 정도이다.

그나마 얼마 전에 방영된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 때문에 낭산에 있는 선덕여왕릉을 찾는 사람이 조금은 많아졌지만......

 

인터넷에는 경주를 소개하는 많은 사이트들이 있으나 이 낭산지구를 소개하는 내용은 거의 없다

 

알고보면, 낭산(狼山)은 유적의 밀집도로 비교할 때 남산(南山)에 비할 바가 아니다.

긴 남북의 길이가 4km도 채 안되며 동서 길이 1km도 안되는 나지막한 둔덕에 지나지 않지만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선덕여왕릉과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 대군을 물리친 신라 최대 호국사찰인 사천왕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왕실사찰 황복사, 문무왕의 화장터 능지탑. 삼존마애지장보살이 있는 중생사 등 산 전체가 유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서라벌의 진산(鎭山)이다.

 

뿐만 아니라 낭산의 둘레에는 진평왕릉, 효공왕릉, 신문왕릉을 비롯해 황룡사지, 미탄사지.분황사지, 망덕사지, 보문사지, 전탑지 등이 둘러싸고 있어 주변지역까지 둘러보려면 하루 일정이 다 간다


 

진평왕릉에서 바라본 낭산 북편

 

낭산은 경주시가지의 동쪽에 남북으로 길고 낮은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 최고봉이 해발 115m에 불과한 낮은 산이다

위에서 보면 이리가 엎으려 있는 모양이라고 해서  이리 낭(狼)자를 써서 낭산(狼山)이라 부르는데, 토함산, 선도산, 남산, 소금강산등 경주를 에워싸고 있는 동, 서, 남, 북 네 산의 중앙에 위치하여 신라오악 가운데 중악의 자리를 차지하여 왔다

 

신라 실성왕 12년(413년)에

'왕이 낭산에 상서러운 구름이 서리고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나는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신이 내려와 노는 신성한 곳이니 이제부터 낭산의 나무는 한 그루도 베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 곳을 신유림이라 불렀다고 하니  낭산은 신라 초기부터 매우 신성시 하였던 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낭산의 남쪽에서 부터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산재해 있는 유적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사천왕사지

 

발굴조사 중인 사천왕사지

(뒷쪽 길게 이어진 녹색부분이 낭산이다)

 

 674년 당이 신라를 침공하려 하자 문무왕이 명랑법사(明郞法師)에게 당나라 군사을 막을 계책을 구했다. 이에 명랑법사는 낭산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침략이 임박하여 절을 완성시킬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자 우선 채백(彩帛-칠을 한 비단)으로 가건물을 짓고 풀을 묶어 오방(五方)에 신상(神像)을 만든 후 유가명승(瑜伽明僧) 12명으로 하여금 비법을 쓰게 했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일어 당군의 배는 모두 침몰되었다고 한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하여 사천왕사라고 이름하고 사천왕사성전(四天王寺成典)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고 한다.

 

(문두루비법-신라와 고려시대에 행했던 밀교의식의 하나로서 명랑법사에 의해서 처음으로 신라에 전해진 이 비법은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에 의한 것이다. 이 경에 의하여 불단(佛壇)을 설치하고 다라니 등을 독송하면 국가적인 재난을 물리치고 국가를 수호하여 사회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사천왕사지 발굴에서 드러나는 신장상의 모습

 

 

가람배치는 금당(金堂)을 중심으로 동서에 탑을 세운 쌍탑식가람이며, 금당 북쪽으로는 좌우에 경루(經樓-불경을 넣어두는 누각)를 두었다.

두 탑지(塔址)에는 사방 3칸의 초석이 남아 있고, 그 남쪽에는 중문지(中門址), 경루 북쪽으로는 강당지가 있으며 둘레를 회랑(廻廊)이 둘러싸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고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초무늬 와당(瓦當)과 사천왕이 새겨진 전(塼)이 출토되었고 현재의 발굴조사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현존하는 유물은 사지 남쪽에 있는 머리가 없어진 귀부(龜趺) 2기, 비신(碑身), 당간지주가 있다.

 

 

머리가 잘린 귀부가 쌍으로 있다

 

사천왕사지 귀부의 이수(거북 머리)/국립경주박물관

 

 

 

사천왕사지 남쪽의 귀부는 문무왕의 능비가 세워졌던 곳이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문무왕의 비편은 능비의 아랫부분인데 귀부에 꽂는 부분이 2단으로 되어 있어 현재 사천왕사지에 남아 있는 서쪽 귀부 윗쪽의 구멍과 꼭 맞는다고 한다. 이로써 문무왕의 능비가 사천왕사에 세워져 있었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문무왕 비편/국립경주박물관

 

문무왕릉 비편(碑片)은 조선 후기에 사천왕사지 부근에서 2점이 발견되어 경주 관아에 보관되고 그 탁본이 청나라에까지 유포되기도 했는데, 한때 그 비편이 종적없이 사라졌다가 1960년에 1점이 수습되었고 최근(2009년)에 경주 시내의 어느 민가집에서 수돗가 빨랫돌로 쓰여지던 또 다른 1점이 발견 수습되었다.

 

 

 

 

사천왕사지 입구 도로변에는 1928년 절터 인근 민가에서 옮겨 온 당간지주가 있다.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데 서쪽의 지주는 부러진 것을 접합하여 놓았다.

아담한 규모지만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세 개의 구멍(간공)이 뚫려 있고, 위와 아래는 사각인데 반해 중간은 원형으로 하여 변화를 주었고 간공은 지주를 관통하고 있다.

어느 학자의 논고에 의하면 간공의 수가 많을수록 제작 시기가 올라가며 간공도 모두 원형에서 시작하여 원형과 네모로 변하였다고 한다.

 

사천왕사지는 일제시대 동해남부선 철로를 개설하면서 일본인들이 고의적으로 호국사찰인 사천왕사 경내를 통과하도록 설계하여 사지를 두 동강 내어 버린  슬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망덕사지-뒷쪽이 낭산이다

 

망덕사지의 목탑 심초석

 

 

사천왕지와는 뗄 수 없는 관계의 사찰이 있으니 망덕사지(望德寺址)이다. 사천왕사를 건립할 당시 당나라 군이 문두루비법으로 참패하자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당나라 예부시랑 악붕귀(樂鵬龜)라는 사신을 파견했는데 신라가 사천왕사를 숨기기 위해  망덕사로 유인한 역사적 사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사천왕사 터에서 정 남향이 되는 곳 약 300m 지점 논 가운데에 소나무와 대나무 숲이 있는 곳이다.

현재 이 곳에는 두 개의 목탑지와 금당지, 당간지주, 그리고 많은 초석들이 군데군데에 남아 있다.

 

                                  <관련 글 : http://blog.daum.net/kinhj4801/15960337>

 

 

선덕여왕릉

 

송림 속의 선덕여왕릉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으로 삼국통일 기반을 마련한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이 묻힌 곳은 사천왕사지 뒷편의 작은 봉우리 정상에 있다. 왕릉으로 가는 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 하늘을 가려 마치 1천300여년전 역사의 터널을 지나가는 듯하다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딸로서 이름은 덕만이며  정관 6년(632년)에 왕위에 올라 첨성대(瞻星臺)를 만들고, 분황사(芬皇寺)를 건립하였으며, 황룡사(皇龍寺) 9층 목탑을 축조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또한 김춘추(金春秋), 김유신(金庾信)과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지기삼사'란 선덕여왕이 미리 예측한 세 가지의 일인데, 그 중 하나가 자기의 죽음과 묻힐 장소에  관한 것이다. 

선덕여왕이, 어느날 아무런 병도 없는데 불현듯 신하들에게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지시를 히였다. 이에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되묻자 여왕은 낭산의 남쪽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나중에 왕이 돌아가시자 낭산에 있는 낮은 세 개의 봉우리 중에서 가장 남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냈다. 

이후 선덕여왕이 숨진지 30여년 뒤에 선덕여왕의 능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졌다. 불가에 따르면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선덕여왕의 말대로 낭산의 남쪽 즉 자신이 묻힌 곳이 바로 도리천이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왕릉의 위치와 현재 왕릉의 장소가 일치하므로 선덕여왕릉임이 거의 확실하다.

 

드라마 '선덕여왕' 방영 이후 이 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잦아졌으며 특히 '선덕여왕릉에 꽃을 바치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소문과 함께 젊은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능지탑

 

 

 

 

능지탑의 기단부와 탑신 부분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은 "임종 후 10일 내에 고문(庫門) 밖 뜰에서 화장하라 하라"하고 "상례의 제도를 검약하게 하라"유언을 하였다 라는 기록은 있으나 화장 장소에 대한 구체적인

명시가 없다

능지탑이 문무왕 화장터로 언급된 것은, 일제시대인 1930년대 말 ‘조선고적연구회’ 명의로 발간된 보고서에서 이곳이 화장지(火葬地) 같은 특수한 유적일지도 모른다고 언급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후 삼산오악학술조사단이 1969년부터 1979년까지 11년간 발굴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유구 중심부 지하에서 시커먼 그을음이 넓게 깔려 있는 층이 발견되어 이 곳을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하였다

이 능지탑 주변에서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의 비편 조각이 발견된 것과 주변에 사천왕사가 있다는 것도 이 학설에 보탬이 되었다

 

복원 후 남은 옥개석과 탑재들을 쌓아놓은 모습

 

옛부터 능시탑(陵示塔) 또는 연화탑(蓮華塔)이라 불렀는데 연화탑이라고 부른 까닭은 상부 옥개부분에 돌아가며 복련의 연꽃 조각한 돌 장식을 둘렀기 때문이다

 

이 탑은 낭산 주변에 흐트러져 있던 탑의 재료를 모아 새로 맞추어 놓은 것으로 보여지는데  네모난 정방형의 2층 구조로 되었으며 하층 탑신의 한 변 길이는 23.3m이고 아래층 높이는 1.9m이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12지신상을 새긴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있는 석재를  3층 또는 5층으로 쌓아올린 석탑이며 사방에 소조대불(塑造大佛)을 모신 감실(龕室)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새로 복원된 탑은 단층 기단에 단층인 이형적인 탑이 되었다. 


 

능지탑의 12지상

 

천 수백년 세월의 풍우에 시달려 원형이 허물어졌던 것을 1978년 10월에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1979년 11월 25일 준공하였다. 그러나 1980년 여름 장마에 상당부분이 파손되어  또 다시 재보수를 하는 동안에 12지신상의 대부분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행히도 잃어버렸던 유물 모두를 회수하게 되었는데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신문과 방송의 위력에 잔뜩 겁먹은 도둑들이 어느 날 밤중에 모두 다 제자리에 돌려놓고 갔기 때문이다

 

현재의 능지탑 뒷편에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연화문 석재들이 많이 쌓여있는 것은 능지탑의 발굴 및 복원에 문제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중생사

 

현재의 중생사

 

중생사 마당의 서편 나무 아래 방치되어 있는 불상대좌와 석등 받침

 

 

중생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삼소관음조」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나라의 한 화공이 신라로 건너와서 대비관음상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기도하여 복을 얻음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신라말의 최은함은 대비상 앞에서 기도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후백제의 견훤이 서라벌을 침범하여 부득이 아이를 대비상 앞에 놓고 난을 피하였다가 보름만에 찾아오니 아이는 더욱 생기가 짙고 입에서는 젖냄새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922년(성종 11년) 3월 이 절의 주지 성태가 시주가 없어 절을 유지할 수 없음을 걱정할 때 대비상이 시주를 얻어 주었고 절에 불이 났을 때 대비상이 스스로 절마당으로 옮겨와 화마를 피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낭산출토 관음보살상

 

현재 중생사가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100여m 떨어진 인근 밭뚝에 하반신이 흙 속에 묻히고 머리가 없는  석불입상 한 기가 서 있었다.
머리는 먼저 수습이 되어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어서 1977년 5월에 머리 부분과 몸통을 서로 합쳐서 박물관 뜰에 옮겨 세운 불상이 바로 관음보살상이다

얼굴과 팔이 다른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게 표현되었으며 보관의 길이 때문에 하체가 짧아 보인다.

머리에는 높은 보관을 썼고 장방형의 얼굴은 양 볼이 풍만하며 이마 중앙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백호를 표현하였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씌워 꽃무늬의 테를 돌렸으며 영락장식의 천의를 걸친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데  불상의 전체 높이는 220cm이다

적절한 신체비례와 유려한 세부 표현으로 보아 통일신라 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학자들은 불상이 묻혀있던 그 일대가 옛 중생사지 일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근래에 새로 건립된 현재의 사찰은 처음 선덕사라 이름을 지었다가 다시 중생사라고 이름을 바꾼 것으로 문헌에 나오는 중생사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마애삼존불(피모지장보살)

 

마애삼존불이 있는 지장전

 

본존불인 피모지장보살(두건 또는 모자를 쓰고 있다)

 

 

중생사의 왼쪽 약간 낮은 터에  작은 전실이 있고 이 전실 안에는 3기의 마애불상이 있다. 이 불상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신라 하대인 9세기경으로 잡고 있으나 삼존불이 모셔져 있는 석질의 결이 많이 부서져 있어 불상의 양식 파악에 어려움이 있지만 본존불은 두건을 쓴 피모지장보살로 확인되었고 양쪽 협시는 신장상임을 알 수가 있다.

 

 

피모지장보살

 

본존인 지장보살상은 결가부좌에 두광과 신광을 지녔고 머리 부분의 두건은 넓고 길게 늘여져 어깨 부분을 덮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보이며 두손의 자세는 불분명한데 앞가슴 쪽에 이어졌거나 아니면 복부 쪽에 놓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협시물              <지장보살의 양쪽 협시불>              좌협시불

 

 

왼쪽 협시의 신장상은 암벽이 가로로 두가닥으로 갈라져 파손이 심한 편이나 자세히 보면 갑옷을 입고 오른손으로는 칼과 같은 막대기를 짚고 있다.

측면관의 얼굴 모습은 정확하게 표현되었고 갑옷에 나타난 여러 특징적 모습은 팔부중상 등에서 확인되는 문양과 거의 동일하다. 두 발은 유희좌의 형식을 취한 듯하다.

 

오른쪽 협시의 신장상은 상태가 왼쪽협시불보다는 조금 양호한 편이며 조각 역시 구별할 수 있는 정도로 남아 있다. 자세는 좌측의 협시불과 동일하나 칼을 쥔 모습이 다른데 좌협시가 짚고 있음에 반하여 오른쪽 협시는 오른손으로 쥐고서 전방을 향하고 있음이 다르다.

유희좌의 모습이며 얼굴은 신장상이면서 무서운 상이 아니고 수심에 찬 모습을 지녔다

 

특이한 것은 본존불이 두건(또는 모자)를 쓰고 있는 지장보살인데 이런 형상을 피모지장보살이라 하며 경주 지역에서는 동천동에 있는 작은 피모지장보살 1기와 함께 유일한 형태의 불상이다

 

 

  황복사지

   

  바로 보이는 쪽이 동쪽이며 들판이 끝나는 지점에 진평왕릉과 연화문당간지주가 있고 뒤가 명활산이다

 

 

이 곳은 오래 전부터 황복사지라는 설이 전해왔으나 황복사의 창건자 및 창건연대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37년경에 낭산 동쪽 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기와 조각의 뒷면에는‘황복사(皇福寺)’또는 ‘왕복(王福)’이라는 명문이 음각(陰刻)되어 있어 발견 지점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막연했던 황복사지설에 유력한 증거를 제공했다.

 평기와편(平瓦片) 기록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신라 진덕여왕 6년(652년)에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의상이 황복사에 있을 때 탑을 오르면서 층계를 밟지않고 언제나 허공을 밟고 올랐기 때문에 돌층계를 놓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황복사는 진덕여왕 재위 당시 이미 건립돼 있던 절로 추정된다.

황복(皇福)이라는 절 이름으로 미루어 황복사는 황실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원찰(願刹)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경문왕도 이 사찰에서 화장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황복사지의 특징은 가람배치에 있다. 통일신라시대 사찰은 탑을 금당 앞 남북 축 선상에 세웠는데 이 사찰은 탑을 금당의 앞이 아니고 금당의 뒷쪽(서쪽) 높은 위치에 두었다.

탑 서쪽은 산으로 막혀서 건물이 들어설 만한 공간이 없고 동편과 남편은 넓은 경작지와 마을이다. 지형으로 보아 황복사지는 장항리사지와 같이 탑을 서쪽에, 금당을 동쪽에 둔 소위 좌전우탑(左殿右塔) 가람배치로 추정된다

황복사는 낭산을 배경으로 하고 동향을 바라보는 가람의 배치이기는 하지만 탑과 금당의 위치가 일반 사찰과는 반대되는 특이성을 보여준다. 나원리오층석탑이 서 있는 폐사지의 구조도 황복사지와 같이 동쪽을 바라보는 가람 배치와 불탑이 금당 뒤에 위치하고 있다.

 

  

구황동 삼층석탑 (국보37호)

 

 

 

 

황복사지로 추정되는 곳에 있는 이 탑은 높이 7.3m이며 이중기단을 갖춘 전형적인 통일 신라시대의 석탑으로 국보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옥개석이 두꺼워서 처마가 단출해 보이며 전체적으로 중후(重厚)한 감을 느끼게 하는 탑이다.

작은 석재를 이용하여 결구하였던 초기 석탑과는 달리 단일석으로 쌓아올렸으며, 기단부의 탱주(撑柱)도 세 개에서 두 개로 줄어들었다

몸돌과 지붕 돌은 각각 한 개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몸돌의 높이는 이층부터 급격히 낮아진다. 지붕 돌의 층급 받침은 매층 5단이고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여 단아함을 보여주며 전각 양면에는 풍령(風鈴)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1개씩 있다.

낙수면과 탑신 받침의 접합부는 가는 홈으로 뚜렷하게 긋고 있는 것도 이 탑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 탑은 고선사지와 감은사지 탑의 다음 단계로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 건축양식의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탑이다.

 

 

황복사지 사리함 뚜껑 안쪽의 명문

 

   

황복사지삼층석탑에서 출토된 금제여래좌상(국보79호)

 

1943년 해체 수리 때 탑 속에서 출토된 금제여래입상(국보 80호)와 금제여래좌상(국보 79호)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불상 중에서 유일하게 순금으로 만든 불상이다. 대부분의 불상들은 구리가 섞인 금동불상이다.

함께 출토된 사리함의 뚜껑 안쪽에는 명문이 적혀 있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신라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692년에 이 탑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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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사지 12지상

1930년대 일본 건축학자 노세 우시조(能勢丑三)가 실시한 황복사지 석탑 발굴조사.

십이지상 중 소에 해당하는 축상(丑像)이 노출되고 있다.

곰방대를 문 중년 남성 조선인이 측량용 자를 잡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노출된 상태의 12지중 사(巳)상

 

1968년 당시 문화재관리국이 황복사지를 발굴 할 때 금당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12지신상 석재들을 출토하였으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제자리에 도로 묻어 두었다고 한다. 탑에서 동쪽으로 계단식 밭이 있는데 이 중 3번째 밭 북쪽 끝에 밭 주위로 둥글게 묻혀 있다.
일반적으로 12지신 상은 사찰이 아닌 능묘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절터에서 12지신 상이 나온 것은 이례적이다

 

 

황복사지 출토 12지 중에서 오(午-말)상 

 

십이지상 중에서 3점은 사라지고 9점만 남아 있는데 돋을 새김이 신라 십이지상 중 가장 두드러지고 세련되었으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십이지상의 배치가 불합리하고 돌의 생김새가 특이한 점으로 미루어 이 십이지상은 근처 어느 왕릉에서 옮겨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심층탑에서 남쪽으로 20m 정도 가다가 들판으로 나 있는 길로 들어서면 논 길 옆에 머리가 잘리고 많이 파손된 작은 귀부(龜趺: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2점이 있는데 탑비(塔碑) 또는 사찰의 창건기록을 적은 가람비(伽藍碑)의 귀부로 추정된다. 

머릿돌은 없지만 거북 등에는 육각 무늬가 남아 있고 무늬 안에는 임금 왕(王)자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 비석이 얹히는 비좌 주위에는 화려한 꽃문양이 비신이 섰던 흔적과 함께 새겨져 있다.

 

 

이 근처에서 발견된 여러 개의 비편(碑片)들은 동국대학교 박물관과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비문의 글씨는 왕희지체를 집자한 것이라고 한다 

 

동편 논에 흩어져 있는 석재들 - 능묘 조성에 사용된 석재들로 생각된다

 

 

황복사지의 동편, 진평왕릉쪽 약 100여m 거리의  논바닥에는 석편들이 여럿 흩어져 있는데 역사학자들은 이 돌들이 신문왕릉에 둘러졌을 석편들이며 이 자리가 신문왕릉이 있던 곳으로 본다.

역사학자들은  이 자리가 ‘신문왕이 죽은 뒤 낭산의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부합된다면서 황복사탑이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 역시 신문왕릉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 준다고 주장한다.

(현재 사천왕사지 동남쪽에 있는 신문왕릉은 효공왕릉일 가는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현재 황복사지에 묻혀 있는 12지신상은 이곳의 능이 없어지면서 흩어져 있던 돌을 사람들이 절터로 옮겨 놓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이곳에 흩어져 있는 돌들은 바깥쪽이 곡선으로 다듬어져 있어 이들을 연결하면  김유신 묘 보다 더 큰 봉분이 된다고 한다.

 

 

황복사의 당간지주는 절터 남쪽 민가를 지나 논 가운데 둑에 기둥이 잘린 채 남아 있으나 정확한 시기를 추정하기가 어렵다 

 

 

(추정) 만정사지 

 

(추정) 만정사지 목탑터

 

 

 목탑의 심초석

 

출토된 만정사지(万正寺之)명 숫기와

 

 

낭산의 북서쪽 국도 7호선 옆 논 가운데에 목탑의 심초석이 하나 자리하고 있어 거기가 이름 잃은 절터임을 말해 주고 있다.

최근 도시 가스관 매설을 위한 발굴 조사에서 '만정사지'라는 여러 점의 와당이 출토되어 만정사지라고 추정하고 있다.

  <관련 글 : http://blog.daum.net/kinhj4801/15959649>

 

 

 

독서당

 

도로변에 있는 독서당 입구 표시석

 

 

 독서당의 초석

 

 고운 최치원선생의 유허비<문창후최선생독서당유허비>

 

독서당은 신라 헌강왕때의 석학 최치원이 학문을 닦던 서당이다
도로변 입구에서 약 40여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비석이 있는 전각이 바로 보이고 그 옆에 정면 4칸 측면1칸의 팔작지붕 기와집과 맛배 지붕인 아래채 3칸의 한옥건물이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울창한 숲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고요 적적하며 서쪽으로만 앞이 탁 튀여 남산자락과 반월성이 바로 보인다.

 

독서당은 건립 이후 여러 차례의 보수로 인하여 본래의 형태는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시멘트가 발라진 낮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툇마루가 넓다.

뜰에는 당시의 생활상을 말해주듯 석축을 짜서 깊게 파 내린 우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건물의 담을 사이에 두고 건너펀에는 철종1년(1850년)에 건립된 "문창후최선생독서당유허비"리는 비석이 작은 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무성서원 태산사에 봉안된 최피원의 영정

 

 

호는 고운(孤雲)이요, 자는 해운(海雲), 혹은 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후(文昌侯)인 최치원선생은 신라 헌강왕 원년(857) 경주 사량부(沙梁府)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그는 12세가 되었을 때 당나라에 들어가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18세때 단 한번의 시험으로 곧바로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 황소(黃巢)의 난을 토벌 할 때에는 종사관으로 서기의 임무를 맡았고 그가 지은 격문(檄文)은 명문장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최치원선생은 885년인 헌강왕 11년, 28세의 나이로 귀국을 하자, 신라에서는 그를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로 삼았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습득힌 많은 학문을 신라에서 행하기로 노력하였으나 이미 왕조말기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은 혼란한 세상을 만나 발이 묶이고 걸핏하면 허물을 뒤집어쓰곤 하였다.

그는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여 관직에 나갈 뜻을 버리고 방랑하면서 스스로 위로하였다. 산 아래 혹은 강이나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으며, 책을 베게로 삼아 읽고 시를 읊조리곤 했다.  말년에 그는 가족들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친형인 승려 현준(賢俊), 정현사(定玄師)와 도를 같이 닦는 벗이 되어 조용히 살다가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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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산 답사를 위한 도보 또는 자전거 답사 코스

 

사천왕사지→선덕여왕릉→능지탑→중생사 마애삼존불→독서당→만정사지→황복사지→진평왕릉→보문사지연화문당간지주→보문사→효공왕릉→신문왕릉→망덕사지

 

황복사지까지는 낭산지구의 답사이며 황복사지에서 진평왕릉이 있는 보문지역을 돌아나오면 도로 사천왕사지에 이르게 된다.

승용차로 경주까지 이동하여 도보답사를 할 경우 신문왕릉이나 사천왕사지에 주차를 하고(무료) 위의 코스를 따라 답사를 하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약4-5시간)

 

계속해서 답사를 더 할 경우는

사천왕사지→망덕사지→보리사 석조여래좌상→옥룡암 마애조상군→부처골 감실부처→월정교 복원공사장(현장을 관람할 수 있음)→교동 최부자집→계림→첨성대→천마종→고속터미널

 

자전거답사의 경우 낭산과 보문지역을 둘러본 뒤 사천왕사지에서 동남산(위의 코스)쪽으로 답사를 하면 하루의 코스로 아주 적당하다

 

※ 부처골 감실부처의 사진촬영은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이다.

    동지를 전후하여 오전 중 해의 고도가  낮을 때에 햇빛이 감실 속까지 들어가 전체가 환한 불상의

    얼굴을 담을 수 있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메모 : 경주 낭산관련 좋은 자료가 있어 솔뫼님 블로그에서 모셔왔습니다. 금년 신묘년 새해에 낭산 다녀왔는데 이렇게 많은 문화재가 분포되어 있는 줄 첨 알았습니다.

해피선데이 1박2일에 방영된  경주 문화재 답사여행을 보면서 몇번이고 다녀온 경주이지만 또 다시 가고픈 경주지역이다.  옛신라의 천년고도 경주는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불국사 석굴암 그리고 남산지구가 지정된바 있다.

 

언제나 경주지역을 답사하면서 느끼는 바 이지만 경주는 전 지역의 야외 박물관 같은 느낌이 들정도로 경주시가지를 포함하여 동으로는 감포지구와

안강일때 그리고 울산시 북부지역  북으로는 건천읍일대까지 광범위한 곳에서 신라 천년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몇년전 가족과 함께 남산을 돌아 감포, 구룡포, 포항으로 돌아 영천으로  올 초에는  토함산일대와 남산 그리고 황남대총 특별전이 열리던

경주 국립박물관 답사를 다녀왔다.  다시 겨울이 찾아오기전  이번엔 남남산 지구와 경주시내일대를 가족과 도보로 돌아보고 싶다. 12월이 다가오기전

꼭 다시 가고픈 경주지역 문화재 답사, 오늘 해피선데이 1박2일을 시청하며 다시한번 옛 답사지역을 담아보았다.

 

 

< 감포 대왕암을 배경으로 한컷 담아 보았습니다. : 이수근이 새벽 일출때 찾아간 문무대왕 수중릉 대왕암 >

 

 

<  경주에서 감포로 넘어가면 왼편 언덕에 위치한 감은사지 금당앞에 세워진 감은사지 삼층석탑 : 해질녁에 엄태웅이 찾아간 곳>

 

 

< 겅주 남산 불국에 위치한 석조여래좌상 일명 감실부처님이시네요 : 야밤 달방에 이승기가 찾아간 곳입니다. >

 

 

<경주국립박물관 야외 성덕대왕 신종과 신종에 돋을 새김된 비천상이  종소리 만큼이나 참으로 아름답지요 : 박물관 개방하자 은지원이가 찾아간 곳 >

  

지난주 탑돌이를 1박 2일로 영월 - 평창 - 속초 - 고성 - 양양 -인제를 돌아 어제  인제 원통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원주 집으로

복귀할때  가족에게 전화하니 제가 무지하게 좋아하는 문화재답사와 관련하여 해피선데이 1박2일에 경주 남산이 나온다고

하네요 ㅎ~~~

 

가족도 금년도 1월 신년해돋이 여행시 경주 남산 삼릉계를 저와 함께 답사한적이 있어 더욱 재미있게 티비를 시청하고 있대요

여기에 지난 신년 경주남산 답사 사진자료와 저혼자 다녀왔던 칠불암 마애삼존불과 사방불 그리고 신선암 마애보살상을

더하여 올려 봅니다.

 

특히 서남산일대의 문화유적들은 저는 네번이상 다녀왔답니다. ㅎ~~ 그래도 시간만 허락된다면 또가고 싶어요

 

< 마애 관세음보살상 >

 

< 삼릉계 냉골 석조여래좌상 : 왼쪽가슴에 매듭이 포인트입니다. 법의도 선명하지요 >

 

<앞쪽(서쪽) 바위에 새겨진 선각 삼존불로 내영 아미타삼존불로써 극락세계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선각육존불은 이승과

 저승이 함께 하는 곳이라 할 수 있지요 : 첫번째 보물>

<뒷쪽(동쪽) 바위에 새겨진 선각석가삼존불로  이승을 의미하지요 : 첫번째 보물 >

 

 

<선각마애불 : 두번째 보물과 부부바위>

 

< 석조여래좌상 턱부분 시멘트로 되어있던것을 보수한 모습입니다. : 3번째 보물 >

 

< 상선암 선각마애대좌불  : 4번째 보물 >

 

< 상선암 마애대좌불앞에서 함께 한컷 >

 

< 용장사지 삼층석탑 바위전체를 하층기단으로 사용한 석탑입니다.: 5번째 보물 >

 

 

 

<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 여섯번째 보물>

 

< 칠불암 삼존불과 사방불 : 7번째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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