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      치 : 강원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2. 문화재명 : 원주 법천사지

3. 답사후기 : 다음에

4. 답사자료보기

 

 

 

 

 

 

 

 

 

 

 

 

 

 

 

 

 

 

 

 

 

 

 

 

1. 답사일시 : 2011년 3월 19일(토)

2. 장      소 : 원주시 개운동

3. 후      기

4. 자료사진모음

 

 

 

 

 

1. 일       시 : 2010년 7월 4일

2. 답  사  지 : 강원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영원산성

3. 답사 후기 : 원주 팔경중의 하나 영원산성을 고교동창들과 찾아 보았습니다.

                    참고 : 원주팔경

                       제1경 천년의 고찰 구룡사

                             제2경 500년 강원도의 수부(首府) 강원감영

                             제3경 보은의 전설을 간직한 상원사

                             제4경 치악의 사계 치악산 비로봉

                             제5경 기암절벽과 맑은 물의 간현관광지

                             제6경 호국영령의 성지 영원산성

                             제7경 천주교의 성지 용소막성당

                             제8경 한폭의 동양화 같은 미륵산 미륵불상  

 

                    영원산성

 

                     지정사항: 강원도기념물 제27호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포곡식 석축 산성. 
                    치악산 남서쪽에 있는 산성으로, 지금은 대부분 무너진 상태로 돌무더기처럼 쌓여 있다.
                    대체적으로 상태가 좋은 동쪽 부분의 성벽 높이는 2m 가량이며 비교적 가지런히 쌓았다.

                    축성연대에 대해서는 문무왕 때 쌓았다고 하는 견해가 있지만 892년(진성여왕 6)에

                    궁예가 치악산 석남사를 근거로 인근 고을을 공략하였다는《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궁예가 축조하고 근거한 성곽이 이 산성일 가능성이 많다.

                    산성의 당시 규모는《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가 3,749척이고 성 안에

                    우물 1개소, 샘 5개소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291년(충렬왕 17) 원나라 합단군이

                    침입해 왔을 때 원주의 향공진사 원충갑(元沖甲)이 10여 차례에 걸쳐 적을 무찔러

                    이 성곽을 지킨 역사가 있으며, 또 1592년(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는

                    원주목사 김제갑(金悌甲)이 왜군과 대적하여 일부 적군을 무찔렀으나 힘의 부족으로

                    산성이 함락되어 그의 부인 이씨와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원주와 이웃 고을 주민들이 이 성에 들어와서

                   지키는 곳으로 근처 금대산성이나 해미성과 서로 의지하여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4 .답사사진

 

 

 

 

 

 

 

 

 

 

 

 

1. 일       시  : 2009년 7월 4일(토)

2. 장       소  : 횡성군 강림면 부곡리 태종대와 부곡계곡

3. 관련 사진자료

 

 

 

 

 

 

 

 

 

 

 

 

 

 

1. 일   시 : 2009년 5월 10일

2. 답사지 : 치악산 상원사 3층석탑/대웅전

3. 사진자료

 

 

 

 

 

 

 

 

 

 

 

 

 

벽화묘를 추방한 주자와 '주자가례'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소장 연웅)가 15일 두번째 조선시대 벽화묘 발견 소식을 전했다.

교하노씨(交河盧氏) 문중이 강원도 원주시 동화리의 충정공(忠正公) 노회신(盧懷愼.1415-1456) 묘를 충남 청양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석실(石室) 벽면에서 청룡(靑龍)ㆍ백호(白虎)ㆍ현무(玄武)ㆍ주작(朱雀)으로 구성되는 사신도(四神圖)를 비롯한 벽화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조선시대 상장의례(喪葬儀禮) 전문가인 국립고궁박물관 정종수 관장은 "시간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런 벽화묘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노회신이 사망한 뒤 조선사회에서 석실묘가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해 16세기에는 회격묘(灰隔墓)라는 새로운 묘제(墓制)에 밀려 종적을 감췄으며 그에 따라 무덤 벽화 또한 그릴 수 없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회신 묘는 석실묘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종말기에 축조한 무덤이 되는 셈이다.
석실분이란 글자 그대로 시신을 안치하는 공간을 돌로 쌓은 무덤 양식을 말한다. 고려시대 고분 축조 판세를 완전히 장악하고, 조선 초기까지 유행한 이런 석실분에서 돌은 대체로 크고 납작하게 잘 다듬은 판돌을 이용한다.

회격묘는 지하로 묘광(墓壙.무덤 구덩이)을 파고 목관(木棺)을 안치한 다음, 느릅나무 껍질(柳皮)을 삶아 달인 물로 석회(石灰)와 황토(黃土), 세사(細沙.고운 모래)를 3:1:1 비율로 섞은 삼물(三物)로 관(棺)과 곽(槨.덧널) 주위를 다져 쌓고 봉토를 한 무덤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회격묘는 회곽분(灰槨墳)이라고도 하고 회곽묘(灰槨墓)라고도 부른다. 이런 회격묘에는 당연히 사신도와 같은 벽화를 그릴 수가 없다. 정 관장은 이런 점을 들어 "우리나라 상장의례에서 고분벽화가 사라진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회격묘의 등장과 유행에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유력한 조선왕릉 중에서 현재까지 발굴된 데는 단 한 곳도 없다. 따라서 조선시대왕릉, 혹은 그에 준하는 왕비릉이 도대체 어떤 구조이며, 어떤 부장품을 넣었는지 적어도 고고학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곳은 없는 셈이다.

이 때문에 조선왕릉 중 적어도 한두 곳은 발굴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설혹 조사가 이뤄진다 해도 "5대 문종 이전 왕릉을 발굴하지 않고서는 볼만한 건 없을 것"이라고 정 관장은 예상한다.

왜냐하면 세조 이후 조선의 왕실 혹은 사대부 무덤 양식이 석실묘에서 회격묘로 바뀐 것이 단순히 겉모양의 변화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부장품의 질과 양 또한 모두 눈에 띄게 박장(薄葬.간소한 장례)으로 변하게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 초기에 왕릉을 석실묘로 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회격묘로 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석실묘를 주장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명기(明器)나 명완(明玩) 같은 기물(부장품)을 (무덤에) 간직하기가 어렵다"는 반대 이유를 내세운다. 석실묘를 조성할 때는 적어도 왕릉 혹은 그에 준하는 무덤에는 반드시 사신도와 별자리 그림을 그려 넣는 규정이 조선 초기에는 있었다.

이에 따른다면 왕릉으로는 처음으로 회격묘로 축조한 세조 이전 무덤은 단 한 군데도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모두가 석실묘이며 그 벽면과 천장에는 각종 벽화가 발견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왜 무덤은 15세기를 고비로 석실묘에서 회격묘로 바뀌게 되었을까?
그것은 주자성리학의 보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말 안향이 도입한 주자학은 신흥왕조 조선을 건국한 주체들의 주축 사상으로 자리잡는다. 주자성리학은 단순히 이념뿐만 아니라 제도 자체에서도 새 바람을 몰고 왔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이 주자학의 제도를 집대성한 의례서로 간주됐다.

중국 본토에서는 주자가례가 주희의 저서가 아니라는 주장이 대세인 까닭에 그다지 실생활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조선에서는 그것이 주희의 직접 육성이 담긴 '경전'으로 간주돼 맹위를 떨쳤다.

이 주자가례에는 사람이 죽으면 무덤은 회격(灰隔)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이에 주목한 조선초기의 성리학자들은 줄기차게 석실묘를 대체해 다른 어떤 곳보다 왕릉부터 솔선수범해 회격묘로 만들어야 한다는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전통(석실묘)과 신문화 운동(회격묘) 사이에 일어난 충돌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다. 태종 8년, 태상왕인 태조 이성계가 죽자, 당시 집권층에서는 석실묘-회격묘의 일대 논쟁이 일어난다.

결론을 내릴 수 없던 태종 이방원은 할 수 없이 당시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종묘로 가서 점을 쳐서 어느 쪽이 좋은지를 알아보라는 명령을 내린다. 양녕이 어떤 방식으로 조상들의 뜻을 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론은 석실묘로 났다.

이런 과정들을 거친 뒤 회격묘가 대세를 점하게 되자, 그에 따른 편리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많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 중 하나가 석실묘에 비해 회격묘가 돈과 노동력이 훨씬 적게 든다는 것이었다. 물론 주자성리학의 세계를 무덤으로 구현한다는 것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 토함산 솔이파리 (솔뫼)님 블로그에서 퍼온글>

 

 

조선 고위공무원 무덤벽화 발굴

원주 동화리 노회신 묘

 

  동 단벽 쪽에서 본 북쪽 석실 내부 벽화

 

 

 

석실을 두 개 덧대어 조성했는데 그 덮개돌을 개봉한 모습

 

 

 

원주 동화리 벽화묘(노회신 묘)가 모습을 드러냈다.
벽화묘의 주인공은 교하(交河) 노씨(盧氏) 15대손인 충정공(忠正公) 노회신(1415~1456)이다. 여흥도호부사(驪興都護府使) 겸 권농병마단련부사(勸農兵馬團練副使)를 역임한 인물이다.

벽화묘는 1456년(세조 2)에 조성됐다. 방형(方形) 봉분 내에 앞트기식 돌방 두 개를 배치했다. 석실의 각 벽체는 하나의 대형 화강암석재로 이뤄져 있다. 석실의 천장은 각각 2매의 대형 판석으로 덮여 있다

 

석실 내부의 벽면과 천장에는 먹과 붉은색 안료 등으로 그린 4신도(四神圖)와 인물도, 성좌도 등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묘주가 안치된 북쪽의 석실과 매장 흔적이 없는 남쪽 석실의 벽화는 구성이 다르다. 묘 축조 당시 두 석실의 천장에 성좌도와 네 벽면에 4신도를 미리 그려 넣었고, 이후 묘주를 매장할 때 북쪽 석실의 벽면 하단에만 12구의 인물상을 추가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벽면에 직접 묵선으로 그린 인물의 윤곽, 손에 쥔 홀(笏), 머리에 쓴 책(幘; 쓰개의 일종)과 얼굴의채색 등으로 미뤄 벽화에 나타난 인물상은 1352년 조성된 파주 서곡리 벽화묘와 유사하게 12지신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원주 동화리 벽화묘는 2000년 발굴된 밀양 고법리 벽화묘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발견된 조선시대 벽화묘로 십이지를 표현한 인물상과 더불어 사신도를 배치하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유행한 사신도가 조선시대까지 계승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남쪽 석실의 사신도 가운데 백호의 얼굴은 다소 익살스럽게 표현돼 있어 민화의 시원적 화풍을 알 수 있게 한다"고 전했다.

지난해 노씨 문중이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석실 내 벽화가 발견됐고, 추후 정밀 발굴조사의 필요성에 따라 중원문화재연구소가 석실 재포장 등 임시 보호조치를 해왔다.

이장 시 벽화묘의 봉분 둘레석과 묘비석, 장명등, 상대석, 문인석 등 석물은 모두 충남 청양으로 옮겨갔다. 벽화가 있는 석실만 남아 있는 상태다.

문화재청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소장 연 웅)는 16일 오후 2시, 강원도 원주시 동화리 조선시대 벽화묘(노회신묘) 발굴현장에서 학계의 관계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회의를 개최하고 발굴조사 및 벽화의 보존처리를 진행할 예정이다


*****************************************<뉴시스/이민정기자 2009.4.15>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메모 : 토함산 솔이파리(솔뫼)님 블로그에서 스크랩하여 옮긴 자료입니다.

 귀한분이 찾아 오셔 머물었다는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貴來面)은 지명의 유래에서 알수 있듯이 통일신라말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찾아와 머물렀다 하여 귀래라는 지명이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신라말인지 고려초인지

 창건되었던 암자가 있으니 이가 황산사지이다, 여기서 능선을 타고 20여분 어 오르면 거의 산정상에 미륵불이 암각되어

 있는 미륵봉이 있다.

2008년 주말을 보내는 것도 산행과 유적답사의 두마리 토끼를 잡아볼겸 미륵봉을 찾아 보았다. 완만하게 오르는 양지바른

계곡소로길을 따라 오르면 낙엽밟는 소리와 함께 호젓하게 산행하며 우리 유적을 볼수 있는 산행지와 함께 약간의 암벽을

타는 스릴도 있어 어린이들과도 함께 할수 있을 정도의 가족단위 산행으로 제격인 듯 하다.

1. 산행 및 유적답사 일시 : 2008년 12월 27일 (12 :00 - 15:30)

2. 장   소 :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미륵산(해발 689m)

3. 함께한 이 : 가족과 둘이서

4. 관련자료(유적위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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