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을 대행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문정왕후 태릉. 대윤과 소윤의 문중 간 대결의 핵심 축으로 대윤파를
무력화 시켰다.

 

                  

                   태릉 입구의 아름다운 소나무 길. ‘신의 숲’으로 불리며 참배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토지 많아 무엇해 나 죽은 후에 / 삼척광중(三尺壙中) 일장지(一葬地) 넉넉하오며 / 의복 많아 무엇해 나 떠날 때에 /

수의 한 벌 관(棺) 한 채 족(足)치 않으랴.”

 인간의 영화와 부귀공명이 덧없고 공망함을 표현한 허사가(虛辭歌) 중의 한 소절이다. 사람이 인두겁을 쓰고 태어나

한 생을 영위하면서 평생 부릴 수 있는 욕심의 끝자락은 어디까지 일까. 그래서 각자(覺者)들은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생이면서(生年不滿百) 늘 천 년 세월을 근심한다(常懷千歲憂)’고 경책해 왔건만 막상 권좌에 앉고 곳간이 차오르면

표변해 버리고 만다.

○ 대윤-소윤 앙금 500년 세월에도 남아

 제13대 명종 재위 시 영의정이었던 윤원형은 권력 독점에 장애가 되는 삼종숙(9촌·고조는 같고 증조가 다른 숙질 간)

윤임은 물론 친형(윤원로)까지 죽여 버렸다. 이 윤원형이 후일 사가들이 희대의 악후(惡后)로 꼽는 문정왕후(1501~1565)

의 친동생이다.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으로 갈라선 이들 친족 간의 앙금은 5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서로 불편한 사이다.

 누구나 ‘태릉(泰陵)’ 하면 ‘태릉선수촌’부터 떠올린다. 마치 동명(洞名)이다시피 명사화돼 버린 태릉선수촌은 제11대

중종대왕 제2계비 문정(文定)왕후가 예장된 태릉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화랑로) 산223-19번지.

사적 제201호로 지정된 163만2281㎡(49만3765평)의 광활한 이곳 능역에는 문정왕후 아들인 명종의 강릉(康陵)까지 있어

원래는 태·강릉으로 불러야 맞다.

 임좌병향(동으로 15도 기운 남향)의 태릉 사초지(능강·인공으로 조성한 능 앞의 언덕)에 오르면 거대한 능침과 우람

장중한 상설(象設·석조물)이 참배객을 압도한다. 백성의 노역을 줄이기 위해 세조가 금지시킨 능침의 병풍석이 태릉에는

웅장하게 둘러쳐 있다. 잡귀가 범접 못하게 쥐·소·호랑이 등을 양각한 12지상이 각 방위를 지키고 있다. 문정왕후 생전의

위세가 그대로 다가오는 듯하다.

 언감생심이지만 태릉에 가면 필히 묻고자 함이 있었다.

 “왕후마마, 조선 천하가 마마의 손안에 있었는데 무엇이 부족해 삼종숙과 친오라버니까지 사약을 내려 죽이고 열심히

공부해 벼슬길에 오른 선비들마저 처형하셨나이까. 역사를 통해 마마의 행장(行狀)을 배운 후세인들이 어찌 평가하고

있는지 아시는지요.”

 중종에게 용상은 벅찬 자리였다. 왕위에 오르려면 세자 시절을 통해 왕도교육을 철저히 받는데 중종은 이복형인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돼 그럴 기회가 없었다. 왕도 지식이 부족하고 경륜이 일천하면 학문 연마에 평생을 전념한 신하들에게 밀리고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이 부족한 학문과 치세를 보강하고자 끌어들인 게 사림파 거두 조광조

일파였는데 오히려 이들은 왕을 깔봤다. 이에 중종이 신물을 내고 사림파를 내친 것이 기묘사화다. 옛 어른들은 배고픈

설움보다 더한 것이 못 배운 설움이라 했다.

 여기에다 중종은 마누라(왕실에서 부인에게 사용한 극존칭) 복까지 척박했다. 원비 단경왕후(거창 신씨)는 중종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신수근의 딸이라 해 왕비 책봉 7일 만에 억지 생이별하고, 제1계비 장경왕후(파평 윤씨)는 인종을 낳은 지

일주일 만에 산후병으로 사별했다. 그 후 중종은 11년 동안 계비 책봉을 하지 않고 후궁들과 지냈다. 경빈 박씨가 반정

일등공신 박원종의 양녀였고, 희빈 홍씨 역시 반정공신 홍경주의 딸이었다. 국모 자리가 비었던 것이다.

○ 17년만에 경원대군 출산 `대망' 이뤄

 중종 12년(1517) 또 다른 파평 윤씨가 13년 연상의 중종과 태평관에서 가례를 올리고 17세의 나이로 제2계비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문정왕후다. 당시 왕실은 정희왕후(세조 왕비) 때부터 정현왕후(성종 계비)에 이르기까지 파평 윤씨가

내명부를 장악하고 있어 윤씨 문중의 영향력은 조정 곳곳에 미쳐 있었다.

 중종은 폐비의 아픔과 상처의 슬픔도 있고 해서 젊은 문정왕후를 아끼며 가까이했다. 그동안 후궁 손에 맡겨졌던

세자(인종) 양육도 그녀에게 위탁했다. 어엿하게 왕기(王器)로 성장해 가는 세자를 보며 문정왕후는 초조했다.

내게도 대통을 이을 왕자가 태어나면 좋으련만….

 문정왕후의 대망은 이뤄졌다. 중종 29년(1534), 17년 만에 경원대군을 출산하니 후일의 명종이다. 조정 대신들의

경하 속에 중종의 기쁨은 태산보다 컸다. 문정왕후는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단 격이었다. 경원대군이 태어나면서

문정왕후의 태도는 돌변했다. 갑자기 세자가 눈엣가시가 돼 버린 것이다. 세자만 제거되면 자신의 소생이 대통을

잇게 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세자의 신변에는 목숨을 노리는 해괴망측한 괴변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궐내 세력

판도도 문정왕후 쪽으로 기울었고 왕권을 능가하는 치맛바람에 조정 대신들이 벌벌 떨었다. 문정왕후는 오빠 윤원로와

동생 윤원형을 끌어들여 부동의 권력기반을 구축했다.

 이로 인해 조정은 두 동강 났다. 세자를 보호하려는 대윤파(윤임·김안로)와 경원대군을 차기 임금으로 옹립하려는

소윤파(윤원로·윤원형)로 정면 대결하며 국정은 어지러워졌다. 대윤(大尹) 윤임은 장경왕후 오빠였고 김안로는

장경왕후의 딸 효혜공주를 며느리로 맞았다. 소윤(小尹) 윤원로와 윤원형은 경원대군의 외삼촌이다.

○ 과욕· 죄업들 후손의 몫으로 남겨져

 이들이 역사 앞에 저지른 추악한 죄악상은 추상같은 기록으로 빠짐없이 전해져 500년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용서를 못 받고 있다. 남을 해코지하고 나쁜 짓을 하면 죽어서도 편치 못하다는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선조의 과욕과 막행막식의 죄업은 모조리 후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문정왕후는 조선왕조 최고의 여군주로 천하를 호령하면서도 단장의 고통을 여러 차례 겪었다. 그중 돌이킬 수

없는 흉사가 서삼릉의 중종릉을 천장하고 나서 일어났다. 명종 17년(1562) 중종릉을 현재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

정릉 자리에 옮기고 자신도 묻히려 했으나 이슬비만 내려도 능역이 질퍽거리고 장마 때는 정자각 앞에 배를

띄워야 했다.

 천장 1년 후 시름시름 앓던 손자가 13세로 요서(夭逝)했다. 왕후의 낙심과 절망은 견줄 데가 없었다. 상심이

지나치면 곧 병이다. 2년 뒤엔 문정왕후가 65세로 승하했다. 또 2년이 지나서는 명종이 훙서했다. 문정왕후 →

명종 → 순회세자 3대에 걸친 왕실 가족사의 불행은 대통 승계에 천지개벽을 가져오게 된다. 당시로선 상상도

못했던 후궁손인 군(君)이 왕위(선조)를 잇게 된 것이다.

 문정왕후 이후 승계되는 인종과 명종의 통치행위 일체가 문정왕후를 빼놓고는 성립이 안 된다. 인종을 볶아

8개월 만에 죽게 하고 대통을 이은 어린 아들 명종을 8년간 수렴청정하며 나라를 마음 내키는 대로 휘저었다.

문정왕후의 상세한 행장은 인종과 명종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태릉을 감싸고 있는 숲과 송림은 ‘신의 숲’으로 불릴 만큼 완벽하게 잘 보존돼 있다. 학생들의 소풍지로

각광받으며 일반인과 역사 탐방객들의 기행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문정왕후의 일생을 요약해 실은 소개

책자를 읽으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국방일보 옮김>

 

 

25세로 요절한 장경왕후 파평 윤씨의 희릉. 대윤 윤임의 동생으로 권력 다툼의 와중에서 사후 수난이 끊이지 않았다.

 

희릉 능침 앞의 무인석. 왕권의 상징으로 오직 왕릉에만 세울 수 있다.

 

세상에서 사람이 겪는 고통 중 견줄 데 없는 모진 고통은 아이를 낳는 일이라 했다. 오죽하면 산고(産苦)라 했을까.

그래서 만삭의 임산부가 출산을 하러 산실에 들어갈 때 자기가 신었던 신발을 눈여겨본다고 한다. “내가 과연 저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 하고.

 제11대 중종대왕 제1계비 장경(章敬)왕후는 참으로 박복한 여인이다. 대통을 이을 왕자를 출산하고도 영화를 누려보기는커녕

젖꼭지조차 물려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국본(國本·세자)과 목숨을 바꾼 것이다. 핏덩이 자식을 두고 죽는 한은

골수에 맺힌다 하여 눈마저 감지 못한다고 했는데 장경왕후가 그랬다.

○ 핏덩이 아들 두고 과다출혈로 숨져


 중종 10년(1515) 2월 25일. 장경왕후가 효혜 공주를 낳은 지 5년 만에 산기가 있자 대궐 안은 잔치준비로 분주했다.

중종은 물론 궐 안팎의 대소신료들도 떡두꺼비 같은 왕자가 탄생하기를 학수고대했다. 마침내 우렁찬 고고성과 함께

원자가 태어나니 제12대 인종이다. 나라의 경사였다. 중종은 곧바로 가벼운 죄인들을 방면하고 하급직의 승급을

명하는 성은을 베풀었다.

 그런데 난산이었다. 출산과정에서 몇 번을 기절했다가 깨어난 왕후는 몸을 푼 뒤 한참 만에야 겨우 눈을 떴다.

이미 기력이 쇠진한 데다 과다출혈이었다. 급히 전의를 불렀으나 소생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전갈을 받은

중종이 내전에 들러 마주했지만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었다. 모든 것을 직감한 임금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바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은총을 입은 바가 지극히 크온데 다시 더 번거롭힐 말씀이 없사옵니다.”

 이튿날 왕비의 산후(産後)는 더욱 위중해졌다. 시녀들의 부축을 받고 겨우 일어나 지필묵을 찍어

금상(今上)께 서찰을 올렸다.

 “어제는 심사가 혼망하여 잘 깨닫지 못하고 아뢰지를 못 했습니다. 지난해 여름 바야흐로 몸(인종)을 가지고

 있을 때이옵니다.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이 아이를 낳거든 억명(億命)이라 함이 좋겠다’ 하므로 이를 써서

벽에다 감춰두고 남에게 발설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중종이 벽을 찾아보니 사실이었다. 한없이 측은하고 억장이 무너졌지만 서산낙일 지는 해를 막을 자

그 누구도 없었다. 왕비는 인종을 낳은 지 일주일 만인 3월 2일 경복궁 별전에서 승하했다. 하늘도 무심하여라.

유난히도 심성이 곱고 어질었던 왕후가 죽자 온 산하는 큰 슬픔에 잠겼고 천지신명을 원망하며 앙천통곡했다.

○ 죽음이 불러온 소용돌이 `일파만파'


 자고로 갑남을녀(甲男乙女)나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역사의 축(軸)을 돌려 놓을 순 없다. 역사는 권력의

칼자루와 재물의 곳간에서 예기치 않던 궤도로 급선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5세로 요절한 장경왕후

(1491~1515)의 족적이 찬란할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이 여인의 죽음이 불러온 역사의 일파만파는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는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번지에 있는 조선왕실 능역에는 효릉(제12대 인종) 예릉(제25대 철종)과

함께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이 있어 서삼릉으로 회자된다. 6만5970평의 사적 제200호로 지정된 이곳에는

대군·군·공주·옹주 등 왕손들의 탯줄을 보관하는 태실 54기와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묘도 함께 있다.

전국 각지의 풍수명당에 산재해 있던 태실들을 왕실 정기를 끊기 위해 일제가 강제 집결시킨 것이다.

 간좌(동에서 북으로 45도)곤향(서에서 남으로 45도)의 서남향인 희릉의 잉상(孕上·능침 뒤의 산정기가 응결된 곳)

에 다다르면 애절한 물음부터 앞선다. “그토록 귀한 왕세자를 낳으시고 품에 한번 안아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뜨셨으니 얼마나 원통하십니까. 아울러 왕비마마께서는 당신의 사후에 일어난 끔찍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알고 계시온지….”

 장경왕후 파평 윤씨는 성장과정이 불우했다.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이며 고조부 윤번이 세조의 장인이며

정희왕후의 친정아버지다. 8세 때 어머니(순천 박씨)가 죽자 얼마나 울었던지 사훼(나무 가지처럼 야위고 마름)

지경에 이르렀다고 왕실 내명부 문서에 전하고 있다. 이 참상을 전해 들은 월산대군 부인이 손수 데려다

양육하게 된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친형으로 중종에겐 큰아버지다. 그 월산대군의 부인(승평부인·昇平夫人·정일품)이

파평 윤씨로 장경왕후의 친정 고모였던 것이다. 월산대군은 순천 박씨를 후실로 두었는데 박원종의 누이였다.

연산군이 절세미인이었던 박씨를 겁탈하자 박씨는 자결하고 말았다. 악에 받친 박원종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용상에 앉혔다.

○ 제2계비된 문정왕후 역사 뒤흔들어


 중종이 등극하자 박원종 등 반정세력은 연산군의 처조카딸 되는 중종 원비 단경왕후 신(愼)씨를

일주일 만에 강제로 폐비시켜 궁궐에서 내쫓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매형 집에서 성장해 숙의로 있던

파평 윤씨를 제1계비로 앉히니 바로 장경왕후다. 왕실의 혈연과 혼인관계는 이렇게 얽히고설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장악해 왔다.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자 오빠 윤임(1487~1545)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며 정국은 또다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된다. 이즈음에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훙서한 것이다.

조정은 윤임의 9촌 조카딸이 되는 문정왕후를 제2계비로 맞았다. 여기서 또다시 역사는 뒷걸음질치고

국정은 농단되고 만다.

 장경왕후는 죽어서도 수난을 겪었다. 붕어 후 처음에는 헌릉(현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오른편

산록에 능침을 조성하고 능호를 희릉이라 했다. 그러나 사후의 안식도 오래가지 못했다. 좌의정 김안로가

장경왕후 묏자리가 풍수적으로 흉지라며 이장을 내세워 정쟁을 일으킨 것이다. 문정왕후와 원수지간이었던

김안로가 계모(문정왕후) 슬하에서 자라는 인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김안로는 장경왕후가 낳은

효혜 공주를 며느리로 맞아 중종의 부원군 신분이었다.

 결국 장경왕후는 진명(盡命)한 지 23년 만인 중종 32년(1537) 현재의 서삼릉으로 천장됐다. 7년 후 중종이

승하하자 유명에 따라 희릉 옆에 동원이강릉으로 조영하고 정자각을 왕과 왕비 능 사이로 옮겨 세웠다.

김안로의 권력 전횡으로 장경왕후와 그의 소생 인종과도 원수가 되어버린 문정왕후가 이 상황을

그냥 넘길 리 만무했다.

 왕위에 오른 인종을 닦달하고 볶아 8개월 만에 죽게 한 뒤 아들이 명종으로 즉위하자 세상은 온통

문정왕후 것이었다. 친정 9촌 아저씨 윤임을 사사시키고 동생 윤원형을 권력 핵심으로 내세워

국정을 뒤흔드니 민심은 이반되고 나라 재정은 바닥나고 말았다.

 기어이 문정왕후는 9촌 고모 되는 장경왕후와 남편 중종 사이를 갈라놓았다. 명종 17년(1562) 중종을

현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정릉으로 이장하고 자신도 옆에 묻히려 했으나 뒤늦게 흉지임을 알고

서울 노원구 태릉에 안장됐다. 장경왕후 희릉의 수난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농협 산하 젖소

개량사업소가 들어서면서 입수(入首) 용맥이 회복 불가능하게 훼손되었다.

 장경왕후의 이런 속내를 알고 서삼릉 내의 희릉을 참배하노라면 속절없는 인간 수명이 야속하기만 하다.

더불어 장경왕후의 요절은 명문거족이었던 파평 윤씨 문중을 대윤과 소윤이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으로

갈라놓아 그 앙금이 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가시지 않고 있다.

 

< 국방일보에서 옮김>

 

 조선왕조 최단명 왕비 단경왕후의 온릉. 중종반정의 권력 다툼에 희생된 거창 신씨로 ‘치마바위’의 슬픈 사연을 갖고 있다.

 

182년 만에 복위돼 왕릉으로 조성한 온릉 능역. 홍살문 안의 조영물이 초라하다

 

어쩌다 할머니 산소에 가면 노을 지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먹먹해질 때가 있다. 떼쓰며 울어 대는 손자를 따뜻한 등에 업어 주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봉분에 난 풀 한 포기라도 더 뽑게 된다. 이 모두가 할머니와 포개진 사연이 각별해서다. 그러나 이름 모를 무덤 앞을 지나면서는

무덤덤할 뿐이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인정의 굴곡은 묘지마다 사연이 남달라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가 묻힌 무덤가에는 구구절절한

곡절이 무명 실타래처럼 두툼하기만 하다.

○ 외롭기만 한 단릉…구석구석 한 서린 듯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19번지 온릉(溫陵)의 구석구석에는 한 여인의 한이 알알이 박혀 있다. 제11대 중종대왕의 원비 거창

신(愼)씨가 영면해 있는 외롭기 그지없는 단릉이다. 사적 제210호로 지정된 이곳에 오면 원망부터 앞선다. 도대체 권력의 속성이 무엇이고

개인의 일신영달이 무엇이기에 한 여인의 일생을 이리도 참담하게 비틀어 놓을 수 있는가 하고…. 그러나 역사는 이 여인의 한을

기억의 저 편에 밀쳐 두고 있다.

 사람이 남의 덕을 지나치게 입으면 평생 동안 신세를 갚느라 헤어나질 못하게 된다. 오죽했으면 빚쟁이는 생일날 고깃국도 못 끓여

먹는다고 했을까. 혹시 돈 꿔준 사람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빚도 못 갚는 주제에 생일까지 챙기느냐는 자격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종이 그러했다.

 중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한 살 위인 거창 신씨(후일 단경왕후)와 가례를 올린 뒤 궁궐 밖의 사저에 나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12세의 신랑과 13세의 각시였지만 남달리 금슬이 좋아 조정은 물론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어머니가 왕실의 큰 어른인

정현왕후(성종 계비)였고 12세 위의 연산군은 이복형이면서 처고모부여서 임금 자리만 노리지 않는다면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다.

 단경왕후(1487~1557)의 친정 역시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였다. 아버지(신수근)가 좌의정이었고 고모부가 임금(연산군)이요,

고모가 중전(폐비 신씨)이었다. 우의정이었던 할아버지(신승선)는 임영대군(세종대왕 넷째 왕자)의 사위여서 날 적부터 종친의

혈통이었다. 희성(稀姓)에 속했던 신(愼)씨 문중이 일찍부터 조정에 진출할 수 있었던 건 이 같은 왕실 인연도 한몫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수상(殊常)했고 위태로웠다. 진성대군과 신씨 부부 역시 연산군의 황음무도와 온갖 패악으로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폭군의 비위에 거슬리기라도 하면 살아남는 자가 없을 때다. 권불십년(權不十年)에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고 했다. 백성들은 달도 차면 기울고 물이 끓으면 넘친다는 천리법도를 믿고 기다렸다.

1506년 9월 2일 마침내 학정의 끝 날이 왔다.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의 반정세력이 요동치는 민심을 등에 업고 연산군을 용상에서

쫓아낸 것이다. 조선왕조 창업 이래 115년 만의 지각변동으로 신하가 임금을 폐위시킨 최초의 반정 사건이었다.

 난세에 영웅 나고 전시에 돈 번다고 했다. 뜻밖에도 왕위는 진성대군에게 돌아갔다. 꿈에서도 생각 않던 주상 자리였다.

“임금도 싫고 이대로 살다가 죽겠다”는 진성대군을 억지로 입궐시켜 이튿날 등극시켰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곤룡포에 면류관을

써야 하는데 익선관을 대신 쓰고 용상에 앉았다.

○ 반정세력 중전 책봉 7일만에 폐출

 연산군이 돌연 폐위되며 궐위(闕位)된 건 임금 자리뿐만 아니었다. 중전 신씨도 폐비돼 국모 자리도 비게 된 것이다.

반정세력들이 엉겁결에 부부인(府夫人·정일품의 대군부인)으로 있던 신씨를 중전으로 책봉하니 단경(端敬)왕후다. 사람이 좋은

자리를 오래 유지하려면 주변이 깨끗하고 떳떳해야 한다. 단경왕후는 중전으로 책봉되는 날부터 가슴에 피멍이 맺혔다.

이미 친정아버지(신수근)와 숙부(신수영)는 반정세력에 등 돌렸다 해서 참살당했고, 조정 안에 신씨 비호세력이라곤

한 사람도 없이 제거된 뒤였다.

 이런 단경왕후의 근심은 하루도 못갔다. 중전으로 책봉된 이튿날 반정공신 유순·김수동 등이 다른 공신들과 대신들을

거느리고 중종 앞에 부복해 아뢰었다. 임금은 저들 덕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처지였다.

 “전하, 의거하던 때 신수근을 죽인 것은 큰일에 성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신수근의 딸이 궁중에 들어와 있는데

만일 그를 왕비로 오래 두면 인심이 위태롭고 의혹이 생길 것입니다. 종묘사직에 관계되는 일이오니 은정을 끊고 내보내소서.”

 중종으로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왕이 되고자 함도 아니었는데 자기네들이 임금 자리에 앉혀 놓고 사이좋게 살던 부부를

생이별시키려 하는 것이다. 주상은 체면을 마다않고 이들에게 사정했다.

 “아뢴 일은 심히 당연하나 조강지처를 어찌 그와 같이 하리오.”

 물러설 반정세력이 아니었다. 왕권이 안정돼 중전 세력이 커지면 아비 죽인 대신들을 그냥 놔둘 리 없다는 것을 그

들은 잘 알고 있었다. 반정세력들은 7일 동안 임금 앞에 엎드려 조르다가 급기야는 협박하기까지 했다. 중종 역시 조정에

아무런 세력 기반이 없어 무력할 뿐이었다. 이들이 자신을 내치면 연산군 같은 신세가 될 수도 있는 절체 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다.

 “종묘사직이 지중하니 어찌 사정에 얽매이겠는가. 마땅히 중의를 좇으리라.”

 이리하여 신씨는 책봉 7일 만에 최단명 왕비가 됐다. 이때 중종의 보령 열아홉이었고 단경왕후 나이 스물이었다.

신씨는 폐출돼 쫓겨나면서 진성대군과 사저 시절 즐겨 입던 다홍치마를 입고 나왔다. 그 치마에 얼굴을 묻고 혼절이

되도록 울었다. 차라리 여염집 비천한 작부만도 못한 신세가 돼 버린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비통했다.

○ 임금·폐비 치마바위 보며 서로 눈물

 신씨는 폐출되면서 친정집으로 옮겨 구차한 몸을 의탁했다. 지금의 인왕산 중턱이었다. 중종은 새 왕비와 후궁들

사이에 9남 11녀를 낳고 살면서도 조강지처를 못 잊어했다. 신씨는 중종이 저녁노을이 질 때면 인왕산 쪽을 바라보면서

슬픔에 잠긴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후 경복궁에서 내다보이는 인왕산 큰 바위에 자신의 다홍치마를 걸어 놓았다.

임금과 폐비는 치마 바위를 함께 보며 하염없이 눈물지었다고 한다. 또 중종은 명나라 사신을 맞으러 거둥할 때마다

신씨의 친정집 근처에 일부러 머물며 타고 온 말을 사저에 보냈다. 이때마다 신씨는 사람 먹기도 귀한 흰 죽을 손수

쑤어 말에게 먹여 보냈다. 눈물 반 물 반이었다고 한다.

 유장한 세월 앞에는 높은 권세와 부귀공명도 부질없는 법이다. 명종 12년(1557) 신씨가 세상을 떠나니 71세였다.

20세의 꽃다운 청춘에 임금과 생이별하고 생과부로 산 지 51년 만이었다. 사후 조정은 신씨의 복귀 문제를 놓고

182년을 갑론을박했다. 결국 영조 15년(1739) 단경왕후로 복위시켜 종묘에 배향하나 육신 쓰고 원통하게 산 한맺힌

매듭은 누가 풀어 줄 것인가.

 온릉은 야트막한 곡장과 간단한 석물을 세운 초라한 왕비 능이다. 임좌병향의 남향이어서 햇볕은 잘 드나 좌우가

약한 데다 능 앞의 안산이 가깝다. 후세 사람들은 정순왕후(단종 왕비)의 애달픈 사연은 가슴 아파하면서도 단경왕후의

애끓는 심회는 제쳐 두고 있다. 정순왕후는 어린 나이에 단종과 생이별했지만 단경왕후는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아는

철 든 나이에 중종과 생이별했다. 옛 선인들이 이르기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라 했다.

< 국방일보 옮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중종대왕 정릉. 문정왕후의 억지 이장으로 임금 홀로 있는 쓸쓸한 단릉이다.
봄날 소나기에도 물이 차는 정릉 앞 정자각. 습지에서 잘 자라는 잡초들로 가득하다.


 능 이름을 놓고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정조 능을 융건릉이라고 우겨대는 것이다. “그럼 그곳에 함께 있는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 능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제야 꼬리를 내렸다. 사도세자(추존 장조) 능은 융릉(隆陵)이고 정조 능은 건릉(健陵)이어서 두 능을 합쳐 융·건릉이라고 부른다.

조선왕조의 42기 능 가운데 석 자 이름은 태조의 건원릉(健元陵)뿐이다.

 능명이 같은 경우도 많다. 영릉(英陵·제4대 세종), 영릉(寧陵·제17대 효종), 영릉(永陵·추존 진종)과 장릉(莊陵·제6대 단종),

장릉(章陵·추존 원종), 장릉(長陵·제16대 인조)이 이름은 동일하나 한자가 다르다. 능 이름을 묘호(廟號)라 부르는데 임금이 훙서한 뒤 조정에서

지어 올리는 것이며 재위 당시 치적과 왕의 운명, 성격 등이 포함돼 있기도 하다. 어느 임금도 살아생전 자신의 묘호를 알고 죽은 군왕은 없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왕릉을 선릉이라고 부르는데 원래는 선·정릉이다. 제9대 성종과 제11대 중종(정릉·靖陵)의 부자 왕릉이 함께 있는 것이다.

서울 성북구에 있는 정릉(貞陵·태조 계비 신덕왕후)은 또 다른 왕릉이다. 중종이 예장된 정릉에 가면 안됐다는 생각부터 든다. 3명의 왕비와

7명의 후궁에 9남 11녀를 뒀건만 어이해서 단릉(單陵)으로 쓸쓸히 혼자 있는지. 조선왕릉 중 태조 건원릉과 단종의 장릉도 단릉이긴 하지만

정릉과는 그 사연이 다르다. 중종은 장가를 잘못 가 죽어서도 이 신세가 된 것이다.

○ “임금 하지말고 편한 자리나 묻히지…” 한숨

 또 정릉에 가면 “차라리 임금 노릇 하지 말고 죽어 편한 자리나 묻히지…” 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정릉은 한줄기 소나기만 지나가도

정자각 앞이 질퍽거리는 물 논이나 다름없다. 장마로 물이 불어났을 때는 홍살문 근처에 배까지 띄워 보기에도 민망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

조선왕릉 가운데 능강(岡·능침 앞의 두툼한 인공 언덕) 아래까지 물이 차는 흉지 중의 흉지는 중종릉밖에 없다. 정릉은 건좌손향의 동남향인데

사룡맥(死龍脈)으로 침수를 피할 수 없는 물형이다. 좌향을 제대로 잡으면 냇가 바로 옆을 파도 물이 안 나고, 재혈(裁穴)을 잘못하면 산 중턱을

건드려도 물이 나는 게 풍수의 법수다. 이 또한 고약한 마누라(문정왕후)를 만난 탓이다.

 중종은 등극 과정도 극적이지만 재위 기간 동안 편할 날이 없었다. 연산군의 패악질이 절정에 달했던 1506년 9월 2일.

서울의 밤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반정 주도세력 박원종·성희안·유순정·홍경주 등은 두 패로 나눠 정현왕후를 급히 찾았다.

성종 계비로 진성대군의 생모인 정현왕후 앞에 엎드려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겠다고 아뢰었다.

 순간, 정현왕후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니 될 말이오. 우리 아이가 그 자리를 어찌 감당한단 말입니까.”

 정현왕후가 극구 사양했지만 반정세력도 물러서지 않았다.

 “군신(群臣)들이 협책하여 대계가 이미 정해졌으니 고칠 수 없습니다. 어서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 다른 반정세력 진성대군에 입궐 재촉

 같은 시각 진성대군의 사저. 또 다른 반정세력들이 영문도 모르는 진성대군을 연(輦·임금이 타는 가마)에 태우며 입궐하기를 재촉했다.

이복형인 연산군이 눈치라도 챈다면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어서 겁부터 덜컥 났다.

 “이게 무엇들 하는 짓이오! 나는 임금도 싫고 이대로 사는 것이 좋소이다.”

 이때 진성대군은 거창 신씨(연산군 처남으로 좌의정 신수근의 딸)와 가례를 올린 뒤 대궐 밖에 나가 평범한 왕손으로 숨죽여 살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 시대적 인물이 내리는 판단은 가문의 영고성쇠와 유장한 국운과도 직결될 때가 있다. 반정에 앞서 박원종이

신수근을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좌상대감은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른 낌새를 알아챈 신수근이 버럭 화를 내며 대답했다.

 “비록 임금이 포악하긴 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염려할 바가 못 되오.”

 그의 이 한마디는 번성하던 거창 신(愼)씨 문중을 몰락의 길로 전락시켰다. 자신과 동생(신수영)은 반정세력에게 참살당하고 누이는

폐비돼 기구한 목숨을 이어갔다. 딸 역시 왕비로 책봉된 지 일주일 만에 폐비돼 한 많은 70평생을 망연자실 살아가게 된다.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1488~1544)은 성종의 둘째 왕자로 어휘(御諱·임금의 이름)가 역(?)이다. 남의 덕에 왕이 되다 보니

임금 자리에 있는 동안 신세를 갚느라 힘겹기만 했고 원치도 않는 척신들의 등쌀에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처복마저 없었다.

○ 훈구파 견제 세력으로 사림파 카드 들어

중종은 등극한 뒤 연산군의 폐정을 바로잡고 부왕인 성종조의 태평성대를 이어가려고 진력했다. 그러나 조정은 반정 공신들인 훈구파 세력들의

성토장이어서 임금은 항상 밀렸다. 위기를 느낀 중종이 훈구파들의 견제 세력으로 들이민 게 신진 사림파의 조광조 카드였다. 왕의 절대적

신임을 배경으로 등장한 사림파는 급진적이고 과격한 정책으로 사사건건 훈구파들과 부딪쳤다. 사림파는 ‘욕심 많은 소인배들’이라며

훈구파를 무시했고 훈구파는 사림파를 ‘철없는 야생 귀족들’로 업신여기며 으르렁댔다. 이런 와중에도 중종은 비변사를 설치해 북방 야인과

왜구들을 토벌해 민생 안정을 도모했다. 이로 인한 국방체제 정비와 군비 절감 등은 후대 왕들에게도 본이 됐다. 향약(鄕約)을 통한

지방 자치와 주자도감 설치도 큰 치적으로 남아 있다.

 지나친 과욕은 언제나 화를 부르게 돼 있다. 사림파들이 주장한 반정 공신들의 위훈(僞勳)삭제 상소는 훈구파들을 격노하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쉴 틈 없는 조광조의 강론으로 중종도 이들이 싫어졌다. 이 틈새를 이용해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한 게 기묘사화다. 훈구파들은

궁궐 정원 나뭇잎에 ‘走肖爲王’이라 쓰고 글자에만 감즙을 발랐다. 며칠 후 벌레가 갉아 먹자 희빈 홍씨(홍경주의 딸)를 시켜 임금께 전했다.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으로 중종은 모함인 줄 알면서도 이들에게 사약을 내렸다.

 1544년, 19세로 등극한 중종이 재위 38년 2개월 만에 승하하니 보령 57세였다. 처음엔 서삼릉에 있는 장경왕후 옆에 묻혀 희릉이라 했는데

계비 문정왕후는 이 꼴을 못 보았다. 결국 명종 17년(1562) 시아버지(성종)와 시어머니(정현왕후)가 있는 선릉 왼쪽에 억지로 이장하고

자신도 이곳에 묻히려 했으나 흉지임을 알고 마음을 접었다.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이 등극한 뒤 8년 동안 수렴청정하며 조정을 마음 내키는 대로 휘저었다. 이른바 훈신·척신의 대결이 문중싸움으로

비화되면서 조선 중기는 또다시 혼란의 와중으로 빠져든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이 끝난 뒤에도 명종이 말을 안 들으면 내전에 불러다

매질을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철이 든 임금도 이런 어머니가 원수였다.
< 국방일보에서 옮김>

서울 도봉구에 있는 연산군 묘역. 의정궁주(가운데)와  딸·사위(맨 앞) 묘도 함께 있다.

 

경기 고양시 서삼릉 내에 있는 폐비 윤씨의 회묘. 왕릉 격식을 갖추고 있으나 아들 연산군의 폐위로 능에서 묘로 격하된 뒤
묘비조차 없다.


인구에 회자되는 저명인사나 유명인을 만나게 될 때는 흉금의 설렘과 기대가 있기 마련이다. 세상을 떠난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러 능이나 묘에 갈 때도

미묘한 심사와 감회가 엇갈리긴 마찬가지다. 때로는 망자(亡者)와의 상봉을 기피하고 싶을 때가 있다. 특히 막행막식(莫行莫食)하며 제멋대로 인명을

살상한 인간 백정들 앞에 서면 섬뜩해지기까지 한다.

○ 좌청룡 우백호 局勢 멀어 후손들 고독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 사적 제362호로 지정된 연산군 묘를 취재하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도 악명 높은 임금이어서 사지(死地) 구덩이에

매장했을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1만4301㎡(4326평)의 봉긋한 혈장(穴場)에 3대를 적선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자좌오향의 정남향이다.

다만 묘혈을 휘감은 좌청룡과 우백호의 국세(局勢)가 멀어 후손들이 고독을 면키는 어렵겠으나 이만한 자리도 과분하다 싶다.

 연산군 묘의 내력을 추적하다 보면 뜻밖에도 왕실 혼인과 권력과의 연결고리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곳에는 의정궁주(宮主) 조씨와 연산군의

딸과 사위(구문경)까지 다섯 기의 묘가 있다. 조씨는 세종 4년(1422) 뒤늦게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됐다. 그해 태종이 훙서하자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궁주 작호를 받은 뒤 쓸쓸하게 죽었다. 효자였던 세종대왕은 이 지역을 넷째 왕자 임영대군의 사패지로 내리고 조씨를 봉사(奉祀)토록 왕명을 내렸다.

 임영대군은 딸을 영의정 신승선에게 시집보냈다. 신승선의 딸이 바로 연산군의 부인이다. 따라서 폐비 거창 신씨(愼氏)는 임영대군의 외손녀가 된다.

신승선은 또 아들 신수근(좌의정)의 딸을 진성대군에게 시집보냈다. 후일 중종으로 등극하는 진성대군은 이복 형인 연산군을 처 고모부로 불렀다.

 1506년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폐위되고 강화 서북쪽에 있는 섬 교동도로 쫓겨 가 위리안치됐다. 사방을 가시 울타리로 둘러치고 외부 출입과

사람 접촉을 엄금하는 게 위리안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어제까지의 임금이 얼마를 견딜 수 있는 생활이었겠는가. 음식과 예우는 차치하고라도

주변의 부릅뜬 눈과 손가락질로 연산군은 무너져 갔다. 가슴속에서는 용암보다 더 뜨거운 불덩이가 치솟았고 눈만 감으면 끔찍한 괴물들이 쫓아다녔다.

연산군은 석 달 만에 죽었다.

 조정에서는 혹이 떨어져 나간 격이었다. 유배지 주위에 시신을 묻고 잔정이라도 들까 봐 잡인 출입마저 금지시켰다. 세월이 흐른 7년 후. 사가에서 모진

목숨 연명하던 폐비 신씨가 이복 시동생이자 친정 조카 사위되는 새 임금 중종에게 눈물로 간언했다. “자식도 다 죽고 연고조차 없어졌으니 유골이라도

가까이 있게 해 달라”고. 이런 연유로 연산군은 처 외가 땅으로 이장하게 됐다. 매년 4월 2일 연산군 숭모회서 제향을 올린다.

○ 폐비 윤씨 회묘 정자각커녕 비석도 없어


 며칠 후 필자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의 서삼릉을 찾았다. 희릉(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효릉(제12대 인종)·예릉(제25대 철종)의 세 능이

궁궐의 서쪽에 있다고 해 서삼릉이라 일컫는다. 이곳에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묻힌 회묘(懷墓)가 있다. 지금은 농협 산하 젖소개량사업소가 점유하고

있어 학술연구나 언론 취재 목적이 아니고서는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비공개 지역이다.

 회묘에 가서는 두 번 놀란다. 조선 역대 어느 왕릉 못지않은 규모의 ‘왕릉’이 ‘묘’라는 사실과 이런 ‘능’ 앞에 정자각은커녕 사가 묘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비석조차 없다는 것이다. 근무자의 안내 없이는 ‘희한한 능’ 쯤으로 지나치기 십상이다. 이 모두가 자식을 잘못 둔 탓이다. 폐비 윤씨와 연산군은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성종이 여러 후궁을 두고 자신을 멀리하자 윤씨는 임금의 용안을 손톱으로 긁어 깊은 상처를 냈다. 왕손의 번성이 곧 종묘사직의 번창이었던 왕실 법도였다.

마땅히 왕비는 군왕의 바람을 탓하지 않으며 참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일로 윤씨는 폐비돼 서인이 된 후 사약받아 죽었다.

 생모의 분사(憤死)를 뒤늦게 안 연산군은 어머니 잘못은 생각 않고 극악무도한 살인마로 돌변했다. 사람을 죽여도 그냥 죽이질 않았다. 필설로 옮기기조차

끔찍한 포락(단근질하기), 착흉(가슴 빠개기), 촌참(寸斬·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飄風·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이 그의 사형 수단이었다.

모두가 연산군일기 첫머리 사평(史評)에 있는 기록들이다.

 이런 연산군도 어머니를 추모하는 모정은 눈물겨웠다. 성종이 내린 ‘회묘’란 묘명을 회릉(懷陵)으로 격상시키고 유좌묘향의 정동향인 회룡고조혈에 천장했다.

그때 조성해 놓은 석물들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덧없는 한때의 영화는 순간의 포말(泡沫)로 스러지는 법이다.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능은 다시 묘로 격하됐다.

 연산군은 문장에 능했다. 일기에 전하는 시만 해도 130여 수나 된다. 한번은 어머니 묘에 다녀와 이런 시를 지었다.

 어제 효사묘에 나아가 어머님을 뵙고 / 술 잔 올리며 눈물로 자리를 흠뻑 적셨네 /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이 없건만 /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

 충신 열보다 간신 한 명이 나을 때가 있다고 했다. 무오사화(1498)로 선비들의 기를 꺾고 갑자사화(1504)로 충신들을 제거해 버린 연산군은 기고만장했다.

간신 임사홍과 그의 아들 임숭재를 채홍사(採紅使)와 채홍준사(採紅駿使)로 삼아 전국의 처녀들과 좋은 말들을 징발했다. 각 도에 운평(運平)이란 기생 양성소를

두고 용모와 재예가 뛰어난 기생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국비로 먹이고 입히며 화장품까지 대줬다.

 연산군은 새로운 명칭과 이름도 잘 지었다. 이들 기생들을 흥청(興淸)·계평(繼平)·속홍(續紅)으로 나눠 직급을 정한 뒤 왕과 동침한 기생은 천과(天科)흥청,

왕을 가까이 모신 기생에겐 지과(地科)흥청, 흥청의 보증인에겐 호화첨춘(護花添春)이란 직위를 부여했다. 돈을 절제 없이 함부로 쓰며 흥청거리는 걸

‘흥청망청’이라 하는데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기생 흥청이 나라를 망하게 했던 것이다.

○ 조선 첫 쿠데타 `중종반정'으로 폭정 종식


 연산군은 이것으로도 충족이 안 돼 얼굴 반반한 여염집 규수를 끌어다 무차별 겁탈하고 친족들과 상간도 서슴지 않았다. 큰아버지 되는 월산대군 집 여종

장녹수를 궁으로 불러들여 놀아난 뒤 인사권을 내주고 끝 날에는 큰어머니 순헌 박씨를 억지로 겁간했다. 사냥놀이를 위해 양주·파주·고양 등의 100리 거리

민가를 철거하고 허가 없이 통행하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격분한 박씨 동생 박원종이 성희안·유순정·홍경주 등과 모의해 폭정을 종식시킨 게 중종반정이다.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왕권을 뒤엎은 조선조 최초의

쿠데타 사건이다. 잘못된 권력이 바로 잡히려면 무고한 희생이 수반되는 게 역사다. 이 반정으로 희생된 인명들을 논하자면 역사는 또다시 비참해지고 만다.

 때로는 한 사람의 행보가 역사의 지평을 돌려 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후 거창 신씨 문중은 임사홍과 함께 멸문지화를 당했고 명문거족의 꿈을 접어야 했다.

모두가 사위 하나 잘못 얻은 업보의 산물이다. 붉은 옷에 찢어진 갓을 쓰고 앉아 있는 연산군 가마가 김포를 지날 때다. 길가에서 줄지어 구경하던 촌로와

학동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이, 그 가마에서 내려!”

 <국방일보에서 옮김>


 

온갖 패륜무도와 악행으로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 연산군의 묘(왼쪽). 폐비 신씨(오른쪽)와 가족 모두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연산군이 귀양 가며 황급히 빠져 나간 선인문. 창경궁의 쪽문이다.


개과천선의 기미가 추호도 없고 동정할 여지가 전무한 자를 일러 인간 망종(亡種)이라고 한다. 연산군(1476~1506)은 인간 망종이었다.

인두겁을 쓰고 인간이 자행할 수 있는 온갖 광란과 포악한 짓을 일삼다 왕위에서 쫓겨나 31세로 죽었다. 인간이 사람에게 저지를 수 있는

만행의 끝을 보이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사학계 일부에선 그를 조선 제10대 임금으로 기억해야 하는 역사가 부끄럽다고까지 말한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에 있는 연산군 묘에서 그를 만나 묻고 싶었다.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이 아니라 ‘묘에서 만난 폐주(廢主)’였다.

503년의 시공을 초월한 무례일 수도 있지만 그의 재위 11년 9개월이 너무 안타까워서다.

 “임금이시여, 보령이 스물이면 철 날 때도 됐으련만 역사가 두렵지도 않으셨나이까.”

○ 공부엔 관심 없고 놀이만 좋아하며 게을러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는데 연산군은 어려서부터 왕재(王材)가 아니었다. 8세 때 세자로 책봉됐지만 공부엔 관심 없고

놀이만 좋아하며 게을렀다. 성종은 저런 세자에게 어찌 나라를 맡길 것인지 늘 근심이었다. 당대 최고학자 허침과 조지서에게 왕자 수업을

시강토록 했다.

 두 스승의 시강 방법은 서로 달랐다. 허침은 막무가내의 연산군을 달래가며 융통성 있게 훈교했다. 강직한 조지서는 사제지간의 도리를

내세운 뒤 세자의 태만과 그릇됨을 부왕한테 아뢰겠다며 엄하게 훈도했다. 연산군은 이런 조지서를 극도로 기피하며 나중에 그냥 안 두겠다고

별렀다. 우려는 현실이 돼 버렸다.

 성종이 재위 25년 12월 24일 38세로 승하하자 19세의 연산군이 보위에 올랐다. 성년이 되는 20세가 며칠 안 남아 인수대비의 수렴청정 없이

곧바로 왕권을 행사했다. 왕이 된 연산군은 허침은 영의정을 시키고 조지서는 목 베어 죽여 버렸다. 스승을 죽인 패륜무도를 접한 대신들과

백성들은 경악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부살생으로 시작된 폭정의 불길한 조짐에 불과했다.

 연산군은 4세 때 생모 폐비 윤씨가 사약받아 죽은 줄도 모르고 계비 정현왕후(중종 생모)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성종도 연산군의

못된 성품을 잘 아는 터라 조정과 내명부의 입단속을 철저히 했고 자신이 죽은 후 100년까지 이 사실을 논의조차 못하도록 왕명으로 유언했다.

예나 지금이나 비밀을 간직하려는 자가 어리석다.

 연산군은 왕이 된 이듬해 성종의 능지(誌)를 보고 비로소 출생의 내막과 폐비 윤씨의 억울한 최후를 처음 알게 됐다. 우선 귀양 가 위리안치

(圍籬安置)된 외할머니 신씨와 외삼촌 셋을 풀어주고 윤씨 사당과 신주를 봉안해 성종 묘정(廟廷)에 배향토록 했다. 이때부터 20대 중반의

혈기 왕성한 임금 연산군은 이를 갈기 시작했고 두 눈에서는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 아까운 인재·죄 없는 사람까지 죽여

 연산군은 재위하는 동안 두 번의 사화를 일으켜 아까운 나라 인재들과 죄 없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여기에는 조정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훈구파(보수)와 사림파(진보) 세력의 목숨 건 대결도 한몫했다. 학문을 싫어 했던 연산군은 글 잘하는 선비들한테 모욕감을 느꼈고 왕

노릇하기가 부자유스럽다고 생각했다. 이 틈새를 파고들어 재위 4년 만에 일어난 선비들의 무자비한 죽임이 무오사화다.

 성종실록 편찬 작업을 함께하던 이극돈(훈구파)과 김일손(사림파)은 오래전부터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이었다.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실록 삽입 여부를 두고 둘은 사생결단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조의제문은 훈구파 태두인 유자광을 통해

연산군 귀에 들어갔다. 유자광은 세조가 총애한 인물로 교활한 지혜와 책략이 출중했다.

 연산군은 격노했다. 즉시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사림파 선비들을 난역부도(逆不道)한 죄로 얽어 끔찍한 국문을 날 새워 자행했다. 이로 인해

능지처참과 참형을 당하고 유배· 파직·곤장·좌천된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김일손은 죽고 이극돈도 좌천당했다. 무오년에 일어난 이

옥사는 사초(史草)가 원인이어서 사화(士禍)와 구분지어 무오사화(史禍)라고도 부른다.

 왕들의 행적과 치적을 날짜별로 기록한 걸 실록이라 하는데 연산군은 폐위돼 ‘연산군 일기’라고 부른다. 후일 단종과 신덕왕후 강씨(태조 계비)

까지도 복위되는데 연산군과 광해군만은 유일하게 폐주로 남는다. 연산군 일기에조차 조정에는 살아남은 자가 별로 없어 텅텅 비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자질이 총명하지 못해 문리(文理) 능력과 사무 능력조차 없는 위인이라고 첨언해 놓았다.

○ 서원엔 글 읽는 소리 끊기고 선비는 숨어

 이후부터 조정은 연산군 마음대로였고 어명 한 마디면 안 되는 게 없었다. 조선 강역의 서원에는 글 읽는 소리가 멈췄고 선비들은 난세를 피해

숨어들었다. 이제부터 남은 일은 주색잡기와 사치·방종이었다.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공자 등의 위패를 장악원으로 옮겨 오랫동안 제사도

폐지했다. 세조가 참회지심으로 창건한 원각사를 폐사시켜 연방원으로 개조하고는 예쁜 기생들을 뽑아 상주시켰다. 국비로 먹이고 입히며

분탕질을 치니 조정 살림은 금세 바닥이 났다.

 조정에는 간신들만 득실거리고 감히 왕의 학정을 들고 나서는 자 아무도 없었다. 급기야 백성들이 연산군의 포학을 꾸짖고 비정을 공박하는

글을 언문(한글)으로 써 거리마다 방을 붙였다. 왕은 즉시 전국에 언문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 서적을 찾아내 불태워 버렸다. 이 당시의

분서(焚書) 만행이 가져온 한글 발전의 공백은 오늘날까지도 통한으로 남는다.

 연산군의 패도만행은 무오사화가 있은 지 6년 후 갑자사화(1504)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간신 임사홍이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과 짜고 정적

제거를 위해 왕에게 고자질했다. 중종반정 2년을 앞둔 4월의 일이었다.

 “전하, 폐비께서는 엄 숙의와 정 숙의 두 사람이 참소하여 죽게 된 것입니다.”

 연산군은 바로 두 숙의를 불러다 궁궐 안에 꿇어앉혀 박살낸 후 흔적을 없애 버렸다. 이복동생인 정 숙의의 두 아들 안양군과 봉안군도

귀양 보낸 뒤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인수대비가 “어찌 부왕의 후궁을 죽이느냐”고 패륜을 꾸짖자 갑자기 머리로 들이받아 며칠 후 세상을

떠나게 했다. 이때 죽은 조정 대신들과 연루된 삼족(三族)들은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각종 역사서를 통해 만나는 연산군의 광기(狂氣)는 후세인들에게 본이 될 바가 없다. 그러나 그의 비참한 말로와 역사를 통한 난도질을

목격하며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바 적지 않다. 큰어머니를 겁간하고 기생들을 모아 ‘흥청망청’이 된 유래 등은 다음 호로 이어진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다음날 연산군은 이복동생이자 19세의 새 임금인 진성대군 앞에 무릎 꿇고 아뢰었다.

 “내게 큰 죄가 있는데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폐주는 죄인이 입는 붉은 옷에 갓을 쓰고 띠도 두르지 않은 채

창경궁의 쪽문인 선인문으로 쫓겨났다. 어제까지 용상에 앉아 주지육림(酒池肉林)에 절어 있던 임금의 몰골이었다.

 

< 국방일보에서 옮김>

한명회의 넷째 딸 공혜왕후 순릉. 영의정 한명회는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 보냈으나 모두 스무 살도 안 돼 요절했다.

순릉 앞의 배위(拜位). 능침에 오르기 전 임금과 신하들이 절하던 곳이다.


자식 앞에 장사 없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천하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거머쥔들 낳아 기른 자식의 죽음 앞에는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산해진미가 입에 당길 것이며 무슨 말의 위로가 귀에 들어오겠는가.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있는 영의정

한명회(1415~1487)도 그러했다.

 “왕비마마, 억지로라도 수라를 드시고 기운을 차리셔야 하옵니다. 이 나라 종묘사직의 앞날이 마마께 달렸사온데 어서 툭툭 털고 일어나셔야지요.”

 성종 8년(1474) 4월, 이때 한명회와 부인 민씨는 벌써 몇 달째 대궐 안 구현전(求賢殿)에서 넷째 딸이며 성종 원비인 공혜왕후를 병구완하고 있었다.

 “어머님, 단 물이 소태보다 더 써서 못 넘기겠습니다. 아무래도 일어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공혜왕후 한씨가 친정어머니 민씨를 힘없이 바라보며 겨우 대답했다. 그리고는 눈을 슬며시 내리감았다. 민씨 부인이 기겁하고 깜짝 놀라 남편

한명회를 찾았다. 뒤이어 시할머니 정희왕후(세조비)와 시어머니 인수대비(추존 덕종비), 시숙모 안순왕후(예종 계비) 삼전(三殿)이 황급히 달려왔다.

겨우 눈을 다시 뜬 공혜왕후가 말을 이었다.

○ 한명회 두 딸 왕후 스무 살도 안돼 요절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린 것이나 단지 한스러운 것은 삼전의 기대를 저버려 끝까지 효도를 못하고 부모님께 근심을 끼쳐 송구할 뿐이옵니다.”

마지막 유언이었다.

 한명회는 땅을 치며 앙천통곡했다. 이 무슨 인간이 감당 못할 끔찍한 재앙이란 말인가. 일찍이 예종 원비로 시집 보낸 셋째 딸 장순왕후도

17세로 죽었는데 이번에는 19세의 넷째 딸을 잃은 것이다. 14년 만에 두 딸을 앞세우는 참척(慘慽)이 두렵기도 했지만, 겉으로는 의연했다.

각혈할 것 같은 불행한 남의 가족사를 자칫 계유정난(세조의 왕위 찬탈) 당시 ‘살생부 주살사건’과 연결시킬까 봐서였다. 비록 자신의 외손으로

왕통을 잇는 대망이 무산되긴 했지만, 권력은 여전히 그의 손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후 역사의 전개는 한명회 편으로 기울지 않았다.

 세상 인심이란 참으로 냉혹하고 비정한 법이다. 살아생전엔 그 사람 없이 안 될 성싶다가도 죽고 나면 곧 잊히고 마는 게 인지상정이다.

의로운 한 사람의 죽음이 나라 발전의 동력 요인으로 작용하는가 하면, 지탄받는 자의 장수가 역사 발전의 저해 요인으로 부상되기도 한다.

권력의 정상에서야 천하가 내 것일 듯싶지만, 태양이 하루 종일 중천에 떠 있는 것은 아니다.

 왕조시대 국모는 내명부의 지존으로 한시도 비워둘 수 없는 자리다. 수렴청정 중이던 정희왕후는 숙의로 있던 후궁 파평 윤씨를 계비로 앉혔다.

성종은 후사 없이 떠난 공혜왕후를 잊고 미색이 출중한 윤씨에 빠져들어 세자를 낳으니 곧 연산군이다. 13세의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된 성종은

점차 장성하면서 후궁들을 끼고 살았다. 자신 이외에도 열 명의 후궁을 더 두게 되자 계비 윤씨의 눈에서는 생불이 났다.

 그러나 성종의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어머니 인수대비의 생각은 달랐다. 세조 이래 왕자가 귀하고 일찍 죽는 데에 근심이 태산 같았던 것이다.

조정 벼슬아치들의 양갓집 규수를 골라 후궁으로 들였다. 대신들은 혼기 찬 여식들을 두고 고심했지만 싫은 내색도 못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곱게 키운 딸을 임금 첩으로 보내는 게 안타까울뿐더러 자칫하면 가문이 몰락하는 멸문지화의 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계비 윤씨는 세조가 왕위에 늦게 올라 후궁(근빈 박씨)이 하나밖에 없는 연유로 시할머니가 자기 마음을 모르고, 시어머니는 남편(추존 덕종)이

일찍 죽어 첩 꼴을 안 당해 봐 남의 일로 생각한다고 여겼다. 남편 시앗 꼴은 못 봐도 아들 시앗은 눈 감아 준다고 했다. 왕실 대권을 쥔 두 과부와

질투심에 불타는 윤씨와의 반목은 곧 내명부의 지각 변동으로 비화됐다. 윤씨는 성종을 보기만 하면 볶아댔고 마침내는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

깊은 상처를 내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계비 윤씨는 폐비가 돼 끝내는 사약을 받아 죽고 또 다른 숙의 윤씨(정현왕후)가 연산군을 키웠다. 성종은 연산군을 왕재로

안 봤으나 승하 당시 장성한 왕자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왕위를 이어받게 한다. 이로 인한 무수한 인명 살상과 학정의 피폐는 필설로 형언할 수가 없다.

○ 공혜왕후 죽음으로 왕실 내명부 물갈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권력을 한 손에 잡고 쥐락펴락했던 천하의 한명회도 죽은 뒤 견딜 수 없는 능욕을 당하고 만다. 윤씨의 폐비

사건에 가담했다 하여 연산군한테 부관참시(관을 파내고 시체를 들어내 다시 죽이는 형벌)라는 극형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중종 때 신원이

되긴 하지만 당시 후손들이 당했을 고통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두가 공혜왕후의 요절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역사는 애달파지고

마는 것이다. 나라에 큰 일 하려는 지도자나 인재들에겐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측면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바 적지 않다.

 이런저런 시름을 마다한 채 공혜왕후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 4-1 순릉(順陵)에 안장돼 있다. 사적 205호로 12세 위

친언니이자 시숙모가 되는 장순왕후(예종 원비)의 공릉과 추존 진종(영조의 장남)의 영릉이 있어 공순영릉, 또는 파주 삼릉으로도 불린다.

남편인 성종(선릉)과는 멀리 떨어져 외롭겠지만, 오른쪽 언덕에 언니가 가까이 있어 위안이 될 것이란 생각은 산 사람들의 정서일 것이다.

 왕릉 풍수에 조예를 쌓으려면 당시의 시대상과 권력 배경에 관통해야 한다. 비록 장순왕후와 공혜왕후가 20세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죽어

불쌍할 것 같지만 두 왕후의 친정 아버지는 나는 새도 단박에 떨어뜨린다는 권세가 한명회였다. 당대 일류 신풍(神風)들이 알아서 설설 기며

천하제일 명당 터를 골랐음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래서 역사와 풍수는 동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도 신분이 있다. 공혜왕후는 성종이 등극한 후 왕비 신분으로 승하해 난간석과 문·무인석 등 조형물이 완벽히 갖춰져 있다.

묘좌유향의 정동향으로 능 뒤의 꿈틀대는 입수 용맥은 물론 능 앞을 감아 도는 물길 모두 누가 봐도 길지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언니는

세자빈 신분으로 죽어 초라하기 그지없는 능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세자빈으로 죽은 딸의 무덤을 왕릉으로 꾸미는 월권은 당시

한명회로서도 어쩔 수 없는 왕실과 사회의 규범이었던 것이다.

○ `한씨 왕비시대'서 `윤씨 왕비시대'로 교체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대의 역사를 후대의 판단으로 교정하거나 새로운 정의를 내리려 함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이를테면 연산군과

달리 광해군의 폐위가 부당하다 하여 지금에 와 복위시킨들 역사적 정당성과 가치를 누가 인정하겠느냐는 것이다.

 공혜왕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왕실 내명부의 물갈이로 반전되면서 또 다른 골육상쟁을 불러와 요동치게 된다. 지금까지 청주 한씨가

독점해 오던 ‘한씨 왕비시대’가 끝나고 ‘파평 윤씨 왕비시대’로 교체되면서 조정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만다. 폐비

윤씨(연산군 생모), 정현왕후(중종 생모), 장경왕후(인종 생모), 문정왕후(명종 생모)가 내명부를 휘저으며 조선 중기의 역사는

도탄에 빠지고 만다. 이들 모두가 파평 윤씨다.

 

< 국방일보에서  옮김>

 

              서울 강남 요지에 자리한 선릉의 정현왕후릉. 동원이강릉으로 성종릉의 왼쪽 언덕에 있다.

 

                정현왕후릉 뒤의 입수용맥. 간좌곤향의 좌향을 밀어주는 내룡맥이 압권이다.

 

 

성종이 어렸을 때 일이다.

 세조는 아버지(추존 덕종)를 일찍 여읜 손자 혈( ·성종의 아명)이 불쌍해 자을산군으로 봉하고 세 살 위의 형 정( ·월산대군)과

함께 궁궐 안에서 양육하도록 며느리(인수대비)에게 배려했다. 세자로 책봉된 왕자 외에 다른 왕자가 장성해 가례를 올리면

사가를 마련해 나가 살도록 하는 것이 궁중의 법도였다.

 날씨가 화창한 어느 봄날, 자을산군은 월산대군을 따라 여러 환관(宦官)들과 더불어 궁내 연못가를 산책하고 있었다.

멀쩡하던 하늘에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폭우가 쏟아졌다. 동시에 천지가 진동하는 뇌성벽력과 함께 벼락이 떨어져

옆에 있던 환관 하나가 즉사했다. 모두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어린 자율산군(성종), 뇌우에도 의연

 혼비백산한 환관과 시녀들은 달아났고 월산대군도 넋을 잃었다. 그러나 자을산군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의연하게 서서

적란운(積亂雲)이 걷히고 소나기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세조와 인수대비는 크게 기뻐하면서도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식이 대신 받는 업보라는 것이 과연 인간 세상에 있는 것인가 하고….

 이때 영의정 한명회(1415~1487)는 이토록 범상치 않게 성장해 가는 자을산군을 눈여겨 뒀다. 이미 셋째 딸을 해양대군

(후일 예종)에게 시집보내 왕실과 혈연의 끈을 옭아매 놓았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지모와 책략에 뛰어난 그였다.

이미 월산대군은 소양공 박중선의 딸(순헌 박씨)과 가례를 올린 뒤여서 11세의 자을산군에게 넷째 딸(12세)을 시집보내니

후일 성종의 원비인 공혜왕후다.

 여기서 잠시, 성종 당시 ‘여인의 난’을 열거하면서 월산대군의 처가 얘기를 지나칠 수가 없다. 후일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반정에 큰 공을 세워 영의정이 되는 박원종의 누이가 월산대군의 후실이었는데 절세미인이었다. 월산대군이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20대의 열혈 청년으로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보이는 게 없었다.

미색이 반반하면 여염집 규수를 가릴 것 없이 억지로 끌어들여 정절을 짓밟았고 당숙 제안대군(예종 아들) 집 여종 장녹수와

놀아나며 국고를 탕진해 나라 살림을 위태롭게 했다. 급기야는 큰어머니 되는 박씨를 궁으로 불러들여 겁간(劫姦)하자 박씨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자결하고 말았다. 궁중은 분노했고 백성은 절망했다. 누구보다도 치를 떨며 분기탱천한 박원종이

선봉장이 돼 연산군을 폐위시키니 바로 조선왕조의 첫 반정 사건이다.

 13세에 등극한 성종은 참으로 행복했다. 20세가 될 때까지 할머니(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한 덕에 정무에 관한 책임은

자신에게 없었다. 근심이라면 공혜왕후로 책봉한 한씨와의 사이에 소생이 없었다. 몸이 약한 왕비가 시름시름 앓다가

19세로 세상을 뜨니 국모 자리가 비었다. 슬픔에 잠긴 성종을 할머니가 위로하며 숙의(淑儀)였던 후궁 윤씨를 계비로

승격하니 이 여인이 바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다.

 궁중의 내명부(內命婦)는 임금의 비빈과 후궁을 포함해 일컫는 명칭으로 빈, 귀인, 소의, 숙의, 소용, 숙용, 소원, 숙원 등의

서열 구분이 엄격했다. 왕비 자리는 마땅히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딸을 간택해 앉혔다. 귀인 이하 후궁들 역시 명문가 출신

규수들로 조정의 높은 벼슬이나 배경 없이는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자리였다.

이들에게는 오직 임금의 ‘잠자리 은총’만이 일생일대의 대원이었고 어쩌다 왕자라도 생산하는 날에는 친정가문의 벼락출세와

부귀는 곧바로 보장됐다.

○ 16남 12녀 탄출, 계비 윤씨 질투심 불타

 이 가운데는 일개 말단 궁녀로 입궐했다가 출중한 미색이 임금 눈에 띄어 후궁 자리에 앉는가 하면 비빈의 국모 자리에

있다가도 폐서인이 돼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구중궁궐 내명부 안에서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특히 국모 자리는 아무나 감당 못하는 힘겨운 위치였다. 남편인 임금과 동침한 후궁들을 통솔하며 배다른 자식들을 친자식과

차별해선 안 되는 도인의 자세여야 했다.

 성종은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됐고 20세도 안 돼 상처했다. 숙의 윤씨를 계비로 책봉했지만, 대궐 안의 여자는 모두 왕의

여자였다. 젊은 임금이 정치를 잘해 조정은 태평했고 옥사도 별로 없었다. 백성도 왕을 찬탄하며 생업에 충실했다. 그러나

세상이 좀 편안해지고 느긋해지자 기강이 해이해지고 문란해졌다.

 성종은 공혜왕후와 계비 윤씨 외에도 열 명의 후궁을 더 두어 16남 12녀를 탄출했다. 증조부인 세종대왕 이후 최대의 왕실

번창으로 조정에서는 잔치가 끊이지 않았다. 후기에는 몰래 궁을 빠져 나와 기방까지 출입하며 스스로 유흥에 빠져들었다.

이럴 때마다 속이 뒤집힌 건 계비 윤씨였다. 독수공방으로 지내는 날이 허다했고 후궁들 몸에선 군(君)과 옹주들이 자꾸

 태어났다. 어쩌다 성종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앙칼지게 대들고 호되게 닦달하기까지 했다. 성종은 이런 윤씨가 싫었다.

 어느 날 성종이 모후 인수대비 전에 불려 갔다.
 “주상, 그 용안에 나 있는 손톱자국에 대해 소상히 말씀하시오.”
 추상같은 분부였다. 일찍이 청상과부가 돼 자신을 임금 자리에 앉힌 하늘 같은 어머니가 아니던가. 성종이 얼굴을 붉히면서

“어마마마, 별것 아니옵니다. 그저 소자의 불찰로….”

 “내 이미 자초지종을 다 알고 묻는 것이오. 주상은 바른대로 답하시오.”

 성종은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윤씨가 손톱으로 긁어 낸 상처임을 이실직고했다. 평소 윤씨의

시기 질투를 못마땅해하던 인수대비가 진노했다. 이는 곧 계비 윤씨의 폐비로 이어졌고 폐서인이 돼 퇴출당한 후 사약을

받아 죽고 만다. 옛말에 첩(妾)이 첩 꼴을 못 보고 서방의 계집질엔 돌부처도 돌아앉는다고 했다. 판봉상시사 윤기전의

딸로 숙의에서 계비 자리까지 오른 윤씨는 자신이 후궁(첩) 출신이면서도 첩(후궁) 꼴을 못 봐 자멸의 길을 자초하고

 만 여인이다.

○ 정현왕후(중종 생모)릉 용맥·물길 압권

 윤씨의 폐비와 함께 인수대비는 숙의로 있던 또 다른 윤씨(우의정 윤호의 딸)를 계비로 삼으니 정현(貞顯)왕후다.

정현왕후는 진성대군(후일 중종)의 생모로 어미 없는 연산군을 친자식처럼 키워 내명부와 조정의 존경을 받았다.

여인의 투기심과 시샘의 종말을 폐비 윤씨를 통해 터득했던 것이다. 정현왕후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성종릉(선릉)

왼쪽 언덕에 예장됐다. 성종릉과 함께 동원이강릉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용맥과 물길이 전혀 다르다.

 사람이 남의 불행에 함부로 끼어들 일이 아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내명부의 참극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이

자행됐다. 폐비 윤씨의 복위를 논의할 때 인수대비와 정현왕후는 물론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도 반대하며 거들었다.

이를 뒤늦게 안 연산군이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 죽게 하고, 귀인 정씨와 엄씨는 궁중 뜰에서 직접 목을 베어

버렸다. 이복동생인 정씨의 두 아들 안양군과 봉안군도 귀양 보낸 뒤 사약을 내려 목숨을 끊었다. 이것이 단초가 돼

연산군은 재위 11년 9개월 동안 정사는 돌보지 않고 희대의 폭군으로 돌변했다. 

<국방일보 옮김>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요지에 자리한 성종대왕의 선릉. 세조 이후 금지됐던 병풍석을 둘러쳐 절정기에 달했던 왕권을
대변해 주고 있다.

선릉 정자각을 오르는 계단. 능 제향 시 왼쪽 계단은 임금이나 대축관만 올랐던 신로이고
오른쪽은 헌관과 제관이 다니던 곳이다.


 사람에게 운(運)이라는 게 있을까.

 생각지도 않던 일이 기대 이상으로 잘 풀리고 하는 일마다 척척 맞아떨어질 때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조선 제9대 임금 성종대왕(1457~1494)은

운이 좋은 군주였다. 어떤 왕손은 마땅히 오를 임금 자리에 등극했다가도 목숨을 잃고 또 다른 왕손은 똑똑하고 잘났다는 이유로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아 죽는 판국에 어른들의 계략과 흥정에 의해 만 백성의 어버이가 된 이도 있다.

 옛날 임금의 이름은 백성들이 알지 못하는 어려운 벽자(僻字)로만 골라 썼다. 임금의 이름으로 쓴 한자를 백성들이 잘못 알고 함부로 썼다간

왕실을 능멸했다고 해 문초를 당하기도 했다.

○ 궁궐로 입궐 자을산군으로 책봉

 성종은 1457년(세조 2년)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1438~1457)와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두 달도 안 돼 덕종이 죽자

할아버지 세조가 불쌍히 여겨 궁중에 입궐시켜 키우면서 자을산군으로 봉했다. 성장하면서 세 살 위의 형 월산대군은 소양공 박중선(순헌 박씨)의

딸에게 장가가고 자을산군은 당시 영의정 한명회의 넷째 딸(후일 공혜왕후)과 가례를 올리게 됐다.

 자을산군이 11세에 장가를 들고 보니 장인의 셋째 딸이 숙부 해양대군(예종)의 부인이어서 작은 아버지이면서 동서지간이 되고 작은 어머니이면서

처형이 되는 이상한 촌수가 됐다. 12세 때 숙부가 임금이 됐는데 건강이 안 좋아 모두 걱정이었다. 13세 되던 해(1469년) 겨울 갑자기 20세의

나이로 예종이 승하(11월 28일)하자 할머니가 왕위에 앉혀 당일로 제왕이 됐다. 생각지도 않았던 주상(主上)의 자리였다.

 예종의 아들이면서 사촌지간인 제안대군은 당시 3세여서 왕이 되기가 어려웠지만 3세 위의 건강한 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임금이 된 까닭이

장가를 잘 간 덕분이란 건 나중에서야 알았다. 20세가 될 때까지 할머니(정희왕후)가 시키는 대로 하면 걱정할 게 없었다. 정희왕후는 한명회·

신숙주 등 원상(院相)들과 국정 전반을 논의해 얻은 결론을 어린 왕에게 지시했는데 성종은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그때 할머니는

52세였고 어머니 인수대비 나이는 33세였다.

 대궐의 법도는 지엄하다. 비록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더라도 보령(寶齡) 20세가 넘으면 모든 권력은 주상에게로 넘어간다. 임금은 지존(至尊)이다.

할아버지·할머니는 물론 사가의 부모까지도 신하일 뿐이다. 이는 국모가 된 왕비의 친정부모도 다를 바 없어 곱게 키운 딸을 만나면서도

칭신(稱臣)을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던 것이다.

○ 권력 넘어오자 놀라운 통치력 발휘

 성종은 영특한 임금이었다. 하루아침에 권력이 자신에게로 넘어오자 놀라운 통치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7년의 국정 수습기간 동안 봐 온

온갖 폐단을 기억하고 재위 중에 바로잡으며 기강을 새로이 했다. 긴 세월 수렴청정하며 조정의 막후 실력자였던 할머니도, 사사건건 참견하며

제동을 걸던 어머니도 지켜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우선 성종은 왕위에 못 오르고 요절한 아버지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숙부가 등극하면서 회한의 세월을 보낸 어머니에게 인수대비라는

휘호를 올렸다.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회간왕(懷簡王)이란 덕종의 시호도 받아오게 해 어머니의 한을 풀어 주고 원(園)을 능()으로 격상시켰다.

30세도 안 된 왕의 치적에 탄력이 붙은 것도 이때부터다.

 성종은 원상 제도를 폐지하고 왕명출납과 서무 결재권을 친히 행사했다. 원상제(院相制)는 세조가 사후 왕권의 흔들림을 염려해 최측근

재상들을 원상으로 임명한 뒤 국정을 논의케 했던 최고 권력기관이었다. 한명회·신숙주 등으로 구성된 원상들의 지나친 간섭이 성종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리고는 이들의 견제 세력으로 김종직을 수장으로 하는 신진 사림(士林) 세력을 중용해 왕도정치를 실현해 나갔다.

또한 고려 충신 정몽주와 길재의 후손을 파격적으로 등용해 조정을 놀라게 했다.

 성 밖 선농단(先農壇)에 가 풍년을 비는 제사를 친히 올리고 왕비에게는 손수 누에를 치도록 했다. 선농단 제사 후 소를 잡아 푹 곤 국물에

밥을 말아 파를 섞어 소금 간으로 함께 먹으니 백성들은 감복했다. 오늘날 서민 음식으로 즐겨 먹는 설렁탕의 유래가 여기서 비롯된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개국한 조선왕조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 유습이 남아 일부 친·인척 간의 혼인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

성종은 외가 6촌 이내 결혼을 법으로 금지시켰고 재혼한 여자의 자손에 대해 관직 등용을 금지했다. 숙질과 당형제 간에 다투거나 송사하면

변방으로 내쫓기까지 해 윤리 강상을 엄하게 세웠다.

○ 한달에 두 번씩 군대 사열·국방 점검

 한 달에 두 번씩 군대를 사열해 국방태세를 점검하고 형벌이 남용되지 않도록 탐관오리들을 다스렸다. 특히 문치(文治)에도 주력해 개국 이후

100여 년에 걸쳐 반포된 법전·교지·조례·관례 등을 총망라시킨 경국대전을 완성했다. 이후 경국대전은 왕조 통치 이념의 근간이 됐다.

이 밖에도 삼국사절요·동국여지승람·동문선 등을 편찬해 문물의 전성기를 이뤘다.

 바야흐로 세종대왕 이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태평성대였다. 태조→태종 시대의 역성혁명→무단정치가 세종의 출현으로 막을 내리면서

흉흉했던 민심은 고려를 잊고 조선 백성으로 살아가게 했다. 더불어 단종→세조 시대로 상징되는 왕위 찬탈의 악명도 성종대에 와 비로소

옛 일이 돼 간다. 백성들은 성종을 어버이처럼 따랐고 살림살이도 풍요로워졌다.

 성종은 여자를 좋아했다. 모두 12명의 왕비와 후궁을 거느려 16남 12녀를 뒀다. 한 임금을 섬기는 여자들이 많다 보니 시기와 질투는

말할 것 없고 급기야는 세조 이래 최대 인명 살상극을 부르게 된다. 성종의 치적을 뒤덮고도 남는 조선 최대

‘여인의 난’은 추후에 쓰기로 한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역은 성종 능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부르는 것이다. 선릉(宣陵)에는 성종(임좌병향)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

(간좌곤향)와 함께 아들 중종(건좌손향)의 정릉(靖陵)이 자리하고 있어 선정릉으로 부른다. 서울 강남구 삼성2동 135-4번지 7만2778평의

사적 제199호다. 사방이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노른자 땅에 산소를 공급하며 ‘강남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는 요지 중의 요지다.

 성종은 1494년 희대의 폭군인 아들 연산군에게 어쩔 수 없이 왕위를 넘겨 주고 재위 25년 만에 승하하니 보산(寶算) 38세였다.

성종의 바람기로 인한 내명부의 반란은 다음호로 이어진다. 

< 국방일보에서 옮김>

세자빈 신분으로 승하해 능역 조영물이 초라한 장순왕후의 공릉. 단릉으로 한명회의 셋째 딸이며 예종비가 되기 전인
17세에 요절했다.

공릉 정자각 앞의 홍살문. 속세와 능역을 가르는 상징문으로 잡귀의 범접을 막는 역할을 하며
홍전문이라고도 한다.


 세상은 남자가 움직이는데 세상을 움직이는 그 남자는 여자가 움직인다고 했다. 특히 남성 전횡의 시대였던 조선왕조에는 이 말이 더욱 적중했다.

낮은 벼슬아치가 고위직 관료를 직접 만날 수 없을 때 ‘안방마님’이나 ‘그의 여인’을 통해 뜻한 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곤 했던 것이다. 이럴 때마다

'베갯잇 송사’라 해 의기 투합하거나 뇌물만 적절히 공여하면 일이 잘 되는 건 맡아 놓은 당상이었다.

 조선왕조 27대왕 519년 역사를 통해 초기에 속하는 단종→ 세조→ 덕종(추존)→ 예종→ 성종→ 연산군 시대의 왕실 여인들만큼 치열하고

처절한 삶도 없었다. 불과 40여 년의 통치 기간에 조선 전사(全史)가 투영될 만큼 온갖 권모와 결탁이 포개져 있기 때문이다.

여섯 명의 임금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왕위에 오르기 전 남편이 죽고 설상가상으로 반정까지 일어나 ‘왕의 여자’들의 한숨과 굴곡진

삶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 4대 독비 인과관계 난마같이 얽혀

 이 모두가 재위 기간이 짧거나 임금이 단명하는 데서 비롯된다. 성종시대 이후는 그때 가서 다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정순왕후(단종),

정희왕후(세조), 인수대비(덕종), 안순왕후(예종 계비)의 인생 역정을 약술하고자 한다. 왕실의 ‘4대 독비(獨妃)’ 얘기로 모두가 동시대를

살면서 난마같이 얽힌 인과관계가 한맺힌 이슬로 응어리져 있다.

 왕실의 4대 독거왕비가 태어나게 된 배경은 이렇다. 어린 장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숙부 세조는 왕위를 빼앗고 죽여 버려 정순왕후

(여산 송씨·1440~1521)를 어린 생과부로 만들었다. 세조는 장남 의경세자(덕종)를 왕위에 앉히려 했으나 20세로 요절하니 인수대비

(청주 한씨·1437~1504)가 홀로 됐다.

 세조는 둘째 아들(예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당시 최고 권력가였던 한명회의 셋째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는데 그가 바로 추존된

장순왕후(청주 한씨·1445~1461)다. 장순(章順)왕후는 아들 인성대군을 낳았는데 산후병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인 17세 되던 해

모자가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다시 간택한 왕비가 안순왕후(청주 한씨·1445~1498)인데 이번에는 예종이 일찍 죽어 역시 혼자가 됐다.

 부모로서 차마 겪지 못할 참혹한 꼴을 당한 세조마저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재위 13년 3개월 만에 승하하니 정희왕후(1418~1483)도 독거 신세가 됐다.

이 모두가 18년 만에 생긴 왕실 내명부(內命婦)의 변고였다. 이때 왕실의 최고 어른은 당연히 정희왕후였다. 왕실에 과부가 넷이다 보니

네 여인의 감정은 미묘하게 흘렀다.

 이때 정순왕후(단종왕비)는 동대문 성 밖 정업원에서 홀로 연명하며 한많은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인연을 잘못 만나 임금이던 남편을 잃고

친정 가문마저 멸문지화를 당한 판에 무슨 희망이 있었고 낙을 바랐겠는가. 매일 새벽 뒷산 동망봉에 올라 먼저 간 단종을 그리며 통곡하는 게

일과였다. 다만 이 모든 원인을 제공한 시숙부(세조)의 집안 돼 가는 꼴을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무섭고도 섬뜩한 일이었다.

생몰연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정순왕후는 82세라는 기록적인 장수를 했다. 조정에서도 후환이 염려스럽긴 했으나 대를 이을 자식도 없고

대항 세력권에서도 벗어나 천수를 누리도록 내버려 뒀다.

 누구보다도 속이 뒤집어진 건 인수대비였다. 친정아버지 한확이 세조 등극에 공이 커 조정에서는 그녀를 무시 못했으나 현실적으로는

남편이 일찍 죽어 사가(私家)에 나가 살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들 둘(월산대군·자을산군)이 있었지만 왕위는 이미 시동생(예종)에게 넘어가

젊은 나이에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한 뒤였다.

 다행스러운 건 조정의 실세 한명회의 넷째 딸(후일 성종원비 공혜왕후·1456~1474)이 둘째 며느리여서 큰 위안이었다. 당대의 최고 권세가

한명회도 셋째 딸이 예종 원비였다가 일찍 죽은 게 한이어서 인수대비와 사위되는 자을산군에 대한 예우와 보살핌이 극진했다. 여기에는

또 다른 태산을 움직이려는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큰 뜻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 인순왕후 위상·영향력 급격히 추락

 반면 안순왕후 처지는 딱했다. 아버지 한백륜이 우의정으로 명문가 청주 한씨 출신이었으나 한명회의 세력을 덮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남편 예종이 장수만 했어도 어린 남매(제안대군·현숙공주)가 있어 앞날이 보장됐으나 즉위 14개월 만에 세상을 뜨니 왕실 내에서의 위상과

영향력은 급격히 추락했다.

 여자로서 더더욱 참기 어려운 건 손위 동서 인수대비의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사가에 있을 때는 자신더러 중전마마라 했는데

자을산군이 왕이 되면서 갑자기 대비마마가 돼 버린 것이다. 자신은 뒷전이고 시어머니 정희왕후와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상전 위(位)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정희왕후는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었다. 남편(세조) 덕에 출세한 조정 대신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돈수백배했고 어린 왕의

수렴청정을 하면서도 그녀의 말 한마디는 곧 어명이었다.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한명회의 두 딸을 이미 며느리와 손자 며느리로

맞아들여 권력의 누수는 염려 안 해도 됐다. 외손자가 왕이 될 판인데 딴 맘 먹을 자 그 누구이겠는가.

○ 13세 자을산군 등극 성종시대 열어
 병약했던 예종이 승하하자 정희왕후는 한명회를 불러 상의했다. 종묘사직의 후사를 결정짓는 중대사였다. 이때 인수대비의

장남 월산대군은 16세였으나 소양공 박중선의 딸(순헌 박씨)한테 장가를 가 처가 덕은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여기서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 술수가 결탁으로 맞아떨어졌다. 두 사람은 흔들림 없는 왕권 유지를 위해 13세의

자을산군을 그날로 등극시키니 바로 성종이다. 조선왕조를 통해 왕이 승하한 날 차기 왕으로 등극한 건 성종이 처음이다.

인수대비 입장에선 누가 왕이 되더라도 자신의 소생임은 마찬가지였다.

 이런저런 시름을 마다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이가 장순왕후다. 비록 대통을 이어야 한다는 친정아버지 꿈을 못 이뤘지만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4-1에 세자빈의 예로 장사 지냈다. 능호는 공릉(恭陵)으로 홀로 모셔진 단릉(單陵)이며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다수의 석물이 생략됐다.

 후일 친동생이면서 조카 며느리 촌수가 되는 공혜왕후(성종원비)의 순릉과 제21대 영조의 장남 진종(추존)과 효순왕후의

영릉이 조성되면서 공순영릉 또는 파주삼릉으로 불리고 있다. 사적 제205호로 벽제화장터에서 문산 방향으로 가는 도중 오른쪽의

이정표를 유심히 살펴야 바로 찾아갈 수 있다.

 홍살문 앞의 금천교(禁川橋·왕릉과 속계를 가르는 풍수상의 물길)를 지나 능상에 오르니 술좌(戌坐)진향(辰向)의 동남향으로

당대의 국풍(國風)이 잡은 자리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공릉은 장순왕후의 짧은 생애와 함께 별다른 행적이 없어 조선왕릉 40기 중 가장 단순한 능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녀의 요절이 가져다 준 왕실대통의 지각변동은 한 인간으로서의 몫도 무시하지 못 한다는 측면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바가 크다.

< 국방일보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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