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도봉구에 있는 연산군 묘역. 의정궁주(가운데)와 딸·사위(맨 앞) 묘도 함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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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시 서삼릉 내에 있는 폐비 윤씨의 회묘. 왕릉 격식을 갖추고 있으나 아들 연산군의 폐위로 능에서 묘로 격하된 뒤 묘비조차 없다. |
인구에 회자되는 저명인사나 유명인을 만나게 될 때는 흉금의 설렘과 기대가 있기 마련이다. 세상을 떠난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러 능이나 묘에 갈 때도
미묘한 심사와 감회가 엇갈리긴 마찬가지다. 때로는 망자(亡者)와의 상봉을 기피하고 싶을 때가 있다. 특히 막행막식(莫行莫食)하며 제멋대로 인명을
살상한 인간 백정들 앞에 서면 섬뜩해지기까지 한다.
○ 좌청룡 우백호 局勢 멀어 후손들 고독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 사적 제362호로 지정된 연산군 묘를 취재하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도 악명 높은 임금이어서 사지(死地) 구덩이에
매장했을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1만4301㎡(4326평)의 봉긋한 혈장(穴場)에 3대를 적선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자좌오향의 정남향이다.
다만 묘혈을 휘감은 좌청룡과 우백호의 국세(局勢)가 멀어 후손들이 고독을 면키는 어렵겠으나 이만한 자리도 과분하다 싶다.
연산군 묘의 내력을 추적하다 보면 뜻밖에도 왕실 혼인과 권력과의 연결고리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곳에는 의정궁주(宮主) 조씨와 연산군의
딸과 사위(구문경)까지 다섯 기의 묘가 있다. 조씨는 세종 4년(1422) 뒤늦게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됐다. 그해 태종이 훙서하자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궁주 작호를 받은 뒤 쓸쓸하게 죽었다. 효자였던 세종대왕은 이 지역을 넷째 왕자 임영대군의 사패지로 내리고 조씨를 봉사(奉祀)토록 왕명을 내렸다.
임영대군은 딸을 영의정 신승선에게 시집보냈다. 신승선의 딸이 바로 연산군의 부인이다. 따라서 폐비 거창 신씨(愼氏)는 임영대군의 외손녀가 된다.
신승선은 또 아들 신수근(좌의정)의 딸을 진성대군에게 시집보냈다. 후일 중종으로 등극하는 진성대군은 이복 형인 연산군을 처 고모부로 불렀다.
1506년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폐위되고 강화 서북쪽에 있는 섬 교동도로 쫓겨 가 위리안치됐다. 사방을 가시 울타리로 둘러치고 외부 출입과
사람 접촉을 엄금하는 게 위리안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어제까지의 임금이 얼마를 견딜 수 있는 생활이었겠는가. 음식과 예우는 차치하고라도
주변의 부릅뜬 눈과 손가락질로 연산군은 무너져 갔다. 가슴속에서는 용암보다 더 뜨거운 불덩이가 치솟았고 눈만 감으면 끔찍한 괴물들이 쫓아다녔다.
연산군은 석 달 만에 죽었다.
조정에서는 혹이 떨어져 나간 격이었다. 유배지 주위에 시신을 묻고 잔정이라도 들까 봐 잡인 출입마저 금지시켰다. 세월이 흐른 7년 후. 사가에서 모진
목숨 연명하던 폐비 신씨가 이복 시동생이자 친정 조카 사위되는 새 임금 중종에게 눈물로 간언했다. “자식도 다 죽고 연고조차 없어졌으니 유골이라도
가까이 있게 해 달라”고. 이런 연유로 연산군은 처 외가 땅으로 이장하게 됐다. 매년 4월 2일 연산군 숭모회서 제향을 올린다.
○ 폐비 윤씨 회묘 정자각커녕 비석도 없어
며칠 후 필자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의 서삼릉을 찾았다. 희릉(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효릉(제12대 인종)·예릉(제25대 철종)의 세 능이
궁궐의 서쪽에 있다고 해 서삼릉이라 일컫는다. 이곳에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묻힌 회묘(懷墓)가 있다. 지금은 농협 산하 젖소개량사업소가 점유하고
있어 학술연구나 언론 취재 목적이 아니고서는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비공개 지역이다.
회묘에 가서는 두 번 놀란다. 조선 역대 어느 왕릉 못지않은 규모의 ‘왕릉’이 ‘묘’라는 사실과 이런 ‘능’ 앞에 정자각은커녕 사가 묘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비석조차 없다는 것이다. 근무자의 안내 없이는 ‘희한한 능’ 쯤으로 지나치기 십상이다. 이 모두가 자식을 잘못 둔 탓이다. 폐비 윤씨와 연산군은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성종이 여러 후궁을 두고 자신을 멀리하자 윤씨는 임금의 용안을 손톱으로 긁어 깊은 상처를 냈다. 왕손의 번성이 곧 종묘사직의 번창이었던 왕실 법도였다.
마땅히 왕비는 군왕의 바람을 탓하지 않으며 참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일로 윤씨는 폐비돼 서인이 된 후 사약받아 죽었다.
생모의 분사(憤死)를 뒤늦게 안 연산군은 어머니 잘못은 생각 않고 극악무도한 살인마로 돌변했다. 사람을 죽여도 그냥 죽이질 않았다. 필설로 옮기기조차
끔찍한 포락(단근질하기), 착흉(가슴 빠개기), 촌참(寸斬·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飄風·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이 그의 사형 수단이었다.
모두가 연산군일기 첫머리 사평(史評)에 있는 기록들이다.
이런 연산군도 어머니를 추모하는 모정은 눈물겨웠다. 성종이 내린 ‘회묘’란 묘명을 회릉(懷陵)으로 격상시키고 유좌묘향의 정동향인 회룡고조혈에 천장했다.
그때 조성해 놓은 석물들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덧없는 한때의 영화는 순간의 포말(泡沫)로 스러지는 법이다.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능은 다시 묘로 격하됐다.
연산군은 문장에 능했다. 일기에 전하는 시만 해도 130여 수나 된다. 한번은 어머니 묘에 다녀와 이런 시를 지었다.
어제 효사묘에 나아가 어머님을 뵙고 / 술 잔 올리며 눈물로 자리를 흠뻑 적셨네 /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이 없건만 /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
충신 열보다 간신 한 명이 나을 때가 있다고 했다. 무오사화(1498)로 선비들의 기를 꺾고 갑자사화(1504)로 충신들을 제거해 버린 연산군은 기고만장했다.
간신 임사홍과 그의 아들 임숭재를 채홍사(採紅使)와 채홍준사(採紅駿使)로 삼아 전국의 처녀들과 좋은 말들을 징발했다. 각 도에 운평(運平)이란 기생 양성소를
두고 용모와 재예가 뛰어난 기생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국비로 먹이고 입히며 화장품까지 대줬다.
연산군은 새로운 명칭과 이름도 잘 지었다. 이들 기생들을 흥청(興淸)·계평(繼平)·속홍(續紅)으로 나눠 직급을 정한 뒤 왕과 동침한 기생은 천과(天科)흥청,
왕을 가까이 모신 기생에겐 지과(地科)흥청, 흥청의 보증인에겐 호화첨춘(護花添春)이란 직위를 부여했다. 돈을 절제 없이 함부로 쓰며 흥청거리는 걸
‘흥청망청’이라 하는데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기생 흥청이 나라를 망하게 했던 것이다.
○ 조선 첫 쿠데타 `중종반정'으로 폭정 종식
연산군은 이것으로도 충족이 안 돼 얼굴 반반한 여염집 규수를 끌어다 무차별 겁탈하고 친족들과 상간도 서슴지 않았다. 큰아버지 되는 월산대군 집 여종
장녹수를 궁으로 불러들여 놀아난 뒤 인사권을 내주고 끝 날에는 큰어머니 순헌 박씨를 억지로 겁간했다. 사냥놀이를 위해 양주·파주·고양 등의 100리 거리
민가를 철거하고 허가 없이 통행하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격분한 박씨 동생 박원종이 성희안·유순정·홍경주 등과 모의해 폭정을 종식시킨 게 중종반정이다.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왕권을 뒤엎은 조선조 최초의
쿠데타 사건이다. 잘못된 권력이 바로 잡히려면 무고한 희생이 수반되는 게 역사다. 이 반정으로 희생된 인명들을 논하자면 역사는 또다시 비참해지고 만다.
때로는 한 사람의 행보가 역사의 지평을 돌려 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후 거창 신씨 문중은 임사홍과 함께 멸문지화를 당했고 명문거족의 꿈을 접어야 했다.
모두가 사위 하나 잘못 얻은 업보의 산물이다. 붉은 옷에 찢어진 갓을 쓰고 앉아 있는 연산군 가마가 김포를 지날 때다. 길가에서 줄지어 구경하던 촌로와
학동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이, 그 가마에서 내려!”
<국방일보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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