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최단명 왕비 단경왕후의 온릉. 중종반정의 권력 다툼에 희생된 거창 신씨로 ‘치마바위’의 슬픈 사연을 갖고 있다.

 

182년 만에 복위돼 왕릉으로 조성한 온릉 능역. 홍살문 안의 조영물이 초라하다

 

어쩌다 할머니 산소에 가면 노을 지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먹먹해질 때가 있다. 떼쓰며 울어 대는 손자를 따뜻한 등에 업어 주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봉분에 난 풀 한 포기라도 더 뽑게 된다. 이 모두가 할머니와 포개진 사연이 각별해서다. 그러나 이름 모를 무덤 앞을 지나면서는

무덤덤할 뿐이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인정의 굴곡은 묘지마다 사연이 남달라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가 묻힌 무덤가에는 구구절절한

곡절이 무명 실타래처럼 두툼하기만 하다.

○ 외롭기만 한 단릉…구석구석 한 서린 듯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19번지 온릉(溫陵)의 구석구석에는 한 여인의 한이 알알이 박혀 있다. 제11대 중종대왕의 원비 거창

신(愼)씨가 영면해 있는 외롭기 그지없는 단릉이다. 사적 제210호로 지정된 이곳에 오면 원망부터 앞선다. 도대체 권력의 속성이 무엇이고

개인의 일신영달이 무엇이기에 한 여인의 일생을 이리도 참담하게 비틀어 놓을 수 있는가 하고…. 그러나 역사는 이 여인의 한을

기억의 저 편에 밀쳐 두고 있다.

 사람이 남의 덕을 지나치게 입으면 평생 동안 신세를 갚느라 헤어나질 못하게 된다. 오죽했으면 빚쟁이는 생일날 고깃국도 못 끓여

먹는다고 했을까. 혹시 돈 꿔준 사람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빚도 못 갚는 주제에 생일까지 챙기느냐는 자격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종이 그러했다.

 중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한 살 위인 거창 신씨(후일 단경왕후)와 가례를 올린 뒤 궁궐 밖의 사저에 나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12세의 신랑과 13세의 각시였지만 남달리 금슬이 좋아 조정은 물론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어머니가 왕실의 큰 어른인

정현왕후(성종 계비)였고 12세 위의 연산군은 이복형이면서 처고모부여서 임금 자리만 노리지 않는다면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다.

 단경왕후(1487~1557)의 친정 역시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였다. 아버지(신수근)가 좌의정이었고 고모부가 임금(연산군)이요,

고모가 중전(폐비 신씨)이었다. 우의정이었던 할아버지(신승선)는 임영대군(세종대왕 넷째 왕자)의 사위여서 날 적부터 종친의

혈통이었다. 희성(稀姓)에 속했던 신(愼)씨 문중이 일찍부터 조정에 진출할 수 있었던 건 이 같은 왕실 인연도 한몫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수상(殊常)했고 위태로웠다. 진성대군과 신씨 부부 역시 연산군의 황음무도와 온갖 패악으로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폭군의 비위에 거슬리기라도 하면 살아남는 자가 없을 때다. 권불십년(權不十年)에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고 했다. 백성들은 달도 차면 기울고 물이 끓으면 넘친다는 천리법도를 믿고 기다렸다.

1506년 9월 2일 마침내 학정의 끝 날이 왔다.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의 반정세력이 요동치는 민심을 등에 업고 연산군을 용상에서

쫓아낸 것이다. 조선왕조 창업 이래 115년 만의 지각변동으로 신하가 임금을 폐위시킨 최초의 반정 사건이었다.

 난세에 영웅 나고 전시에 돈 번다고 했다. 뜻밖에도 왕위는 진성대군에게 돌아갔다. 꿈에서도 생각 않던 주상 자리였다.

“임금도 싫고 이대로 살다가 죽겠다”는 진성대군을 억지로 입궐시켜 이튿날 등극시켰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곤룡포에 면류관을

써야 하는데 익선관을 대신 쓰고 용상에 앉았다.

○ 반정세력 중전 책봉 7일만에 폐출

 연산군이 돌연 폐위되며 궐위(闕位)된 건 임금 자리뿐만 아니었다. 중전 신씨도 폐비돼 국모 자리도 비게 된 것이다.

반정세력들이 엉겁결에 부부인(府夫人·정일품의 대군부인)으로 있던 신씨를 중전으로 책봉하니 단경(端敬)왕후다. 사람이 좋은

자리를 오래 유지하려면 주변이 깨끗하고 떳떳해야 한다. 단경왕후는 중전으로 책봉되는 날부터 가슴에 피멍이 맺혔다.

이미 친정아버지(신수근)와 숙부(신수영)는 반정세력에 등 돌렸다 해서 참살당했고, 조정 안에 신씨 비호세력이라곤

한 사람도 없이 제거된 뒤였다.

 이런 단경왕후의 근심은 하루도 못갔다. 중전으로 책봉된 이튿날 반정공신 유순·김수동 등이 다른 공신들과 대신들을

거느리고 중종 앞에 부복해 아뢰었다. 임금은 저들 덕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처지였다.

 “전하, 의거하던 때 신수근을 죽인 것은 큰일에 성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신수근의 딸이 궁중에 들어와 있는데

만일 그를 왕비로 오래 두면 인심이 위태롭고 의혹이 생길 것입니다. 종묘사직에 관계되는 일이오니 은정을 끊고 내보내소서.”

 중종으로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왕이 되고자 함도 아니었는데 자기네들이 임금 자리에 앉혀 놓고 사이좋게 살던 부부를

생이별시키려 하는 것이다. 주상은 체면을 마다않고 이들에게 사정했다.

 “아뢴 일은 심히 당연하나 조강지처를 어찌 그와 같이 하리오.”

 물러설 반정세력이 아니었다. 왕권이 안정돼 중전 세력이 커지면 아비 죽인 대신들을 그냥 놔둘 리 없다는 것을 그

들은 잘 알고 있었다. 반정세력들은 7일 동안 임금 앞에 엎드려 조르다가 급기야는 협박하기까지 했다. 중종 역시 조정에

아무런 세력 기반이 없어 무력할 뿐이었다. 이들이 자신을 내치면 연산군 같은 신세가 될 수도 있는 절체 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다.

 “종묘사직이 지중하니 어찌 사정에 얽매이겠는가. 마땅히 중의를 좇으리라.”

 이리하여 신씨는 책봉 7일 만에 최단명 왕비가 됐다. 이때 중종의 보령 열아홉이었고 단경왕후 나이 스물이었다.

신씨는 폐출돼 쫓겨나면서 진성대군과 사저 시절 즐겨 입던 다홍치마를 입고 나왔다. 그 치마에 얼굴을 묻고 혼절이

되도록 울었다. 차라리 여염집 비천한 작부만도 못한 신세가 돼 버린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비통했다.

○ 임금·폐비 치마바위 보며 서로 눈물

 신씨는 폐출되면서 친정집으로 옮겨 구차한 몸을 의탁했다. 지금의 인왕산 중턱이었다. 중종은 새 왕비와 후궁들

사이에 9남 11녀를 낳고 살면서도 조강지처를 못 잊어했다. 신씨는 중종이 저녁노을이 질 때면 인왕산 쪽을 바라보면서

슬픔에 잠긴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후 경복궁에서 내다보이는 인왕산 큰 바위에 자신의 다홍치마를 걸어 놓았다.

임금과 폐비는 치마 바위를 함께 보며 하염없이 눈물지었다고 한다. 또 중종은 명나라 사신을 맞으러 거둥할 때마다

신씨의 친정집 근처에 일부러 머물며 타고 온 말을 사저에 보냈다. 이때마다 신씨는 사람 먹기도 귀한 흰 죽을 손수

쑤어 말에게 먹여 보냈다. 눈물 반 물 반이었다고 한다.

 유장한 세월 앞에는 높은 권세와 부귀공명도 부질없는 법이다. 명종 12년(1557) 신씨가 세상을 떠나니 71세였다.

20세의 꽃다운 청춘에 임금과 생이별하고 생과부로 산 지 51년 만이었다. 사후 조정은 신씨의 복귀 문제를 놓고

182년을 갑론을박했다. 결국 영조 15년(1739) 단경왕후로 복위시켜 종묘에 배향하나 육신 쓰고 원통하게 산 한맺힌

매듭은 누가 풀어 줄 것인가.

 온릉은 야트막한 곡장과 간단한 석물을 세운 초라한 왕비 능이다. 임좌병향의 남향이어서 햇볕은 잘 드나 좌우가

약한 데다 능 앞의 안산이 가깝다. 후세 사람들은 정순왕후(단종 왕비)의 애달픈 사연은 가슴 아파하면서도 단경왕후의

애끓는 심회는 제쳐 두고 있다. 정순왕후는 어린 나이에 단종과 생이별했지만 단경왕후는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아는

철 든 나이에 중종과 생이별했다. 옛 선인들이 이르기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라 했다.

< 국방일보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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