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원이라는 사람,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요즘 남자의 자격때문에 마음이 평화롭다.

김태원이 만든 합창곡 '사랑이라는 이름을 더하여'를

듣다보면 처음엔 김태원이 합창곡을 썼다는 음악적 역량에

놀라고 나중엔 가사의 깊이에 놀란다.

대중음악을 하는 가수가 합창곡을 썼다는 이야기를 일찌기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것도 아카펠라 곡이다.

프로그램에선 아직 연습과정이던데 그 멜로디의 유려함이

기존 합창곡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아카펠라가 갖는 교회음악 특유의 경건미에

김태원이 예의 보여주는 서정적인 멜로디 라인이 만나니

속수무책으로 귀가 노래에 달라 붙는다.

고등학교 때부터 성가대를 한 내겐 격조있는 가스펠을 합창곡으로 듣는 느낌이다.

한국의 넬라 환타지아가 탄생한듯 하다.

집사람이나 나나 하루 종일 입에서 멜로디가 떠나질 않는다.

언젠가 김태원이 음악통론을 독파했다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못 생기고 공부못하고 성실하지도 못한 소외당한 한 소년이

주목받기 위해 만지기 시작했다는 기타와 음악이 어느새 이렇게까지

진보한 것이다. 

 
김태원 특유의 멜로디가 우리의 감성을 자연스레 사로잡았다면

김태원의 가사는 실로 압도적이다.

김태원을 87년부터 좋아했다.

김태원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는 나의 영웅이었으니까

나는 아직도 김태원의 예능이 낯설다.

나의 뇌리에 각인된 김태원은 상처입은 괴물처럼

울부짖던 질풍노도의 록커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변하다니

사랑을 잃어버리고

동료에게 버림받고

그 상처에 결박당한채 자포자기하고

차라리 교도소는 피난처였다.

헌신적인 아내의 사랑을 디딤돌로 삼아 다시 일어난

그는 진정으로 부활의 리더가 되었다.

어떤 밴드에게도 부활이라는 이름은 감당할수 없는 큰 이름이다.

너무 커서 촌스러운 이름이다.

그런데 김태원은 진정 부활의 주인공으로 살아왔다.

 그는 25년째 부활의 리더다.

죽지 않으면 부활할수 없다.

한국의 록밴드에게 가난과 고난은 상식이다.

이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부활할 수 있다.

부활이라는 이름은 이제 김태원과 하나가 되었다.

부활은 김태원이다. 
 

김태원의 비범한 내공은 이제 음악을 넘어 인격으로까지

승화되었다.

그는 사람을 귀히 여긴다.

그가 하는 한마디 한 마디에 인간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이 느껴지는 것은 나만이 아닌듯하다.

작금에 그가 얻은 인기가 여기에서 왔다고 나는 믿는다.

박완규와 정단과 이성욱, 여전히 가난과 고난에 처한 옛 동료들을

인기연예인된 김태원은 다시 부활의 이름으로 세상에 세운다.

위대한 탄생에서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손진영을

처절하게 진정성하나로 버티던 20년 전의 나라며 구원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더하여'는 25년 부활로 살아온 김태원의 성찰이 오롯이 새겨져있다. 
 

 

삶이란 지평선은 끝이 보이는 듯해도

가까이 가면 갈수록 끝이 없이 이어지고

저 바람에 실려가듯 또 계절이 흘러가고

눈사람이 녹은 자리 코스모스 피어었네 

 
그리움이란 그리움이라는 이름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더하여

서로를 간직하며 영원히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기에 

 
바람에 실려가듯 또 계절이 흘러가고

눈사람이 녹은 자리 코스모스 피어었네 


또 다시 가려무나 가려무나

모든 순간이 이유가 있었으니

세월아 가려무나 가려무나

모든 순간이 이유가 있었으니

세월아 가려무나 아름답게

다가오라 지난 온 시간처럼 

  

인생의 한치 앞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인생은

김태원의 고백처럼 삶은 지평선처럼 아득하다.

끝이라 여기지만 거기도 누군가의 치열한 삶의 현장일 뿐이다.

시지프스 신화처럼 끝을 알수 없는 고난에 낙심하여 절망하여

사태나듯  한번도 무너져내리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눈사람이 녹은 자리 코스모스가 피었네" 

 
눈사람이 녹은 자리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물이 흥건하다.

낙심의 눈물은 얼마나 외로운가!

그런데 그 눈사람이 녹은 자리에서 코스모스가 피었다.

차가운 눈물이 코스모스를 낳은 생명수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코스모스는 우주이다. 요행도 우연도 아니다.

우주의 섭리였던 것이다.

끝없을 것 같던 절망의 시절도 바람이 흘러가듯 지나가더란다.

그리고 새로운 우주가 시작되더란다.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해본 사람만이 할수 있는 성찰이다.

이 가사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당면했던 순간에는 무너질듯 위태했지만 다 지나고 돌아보니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무슨 조화인가?

그렇게 그리움이란 이름은 살아남은 자를 위한 승리의 증거인지 모르겠다.

못 견디겠던 고난의 그 순간도 그리울 수밖에 없는 인생의 섭리라면

그리움에 사랑을 더하라고 김태원은 권면한다.

어차피 그리울 것이라면 차라리 사랑해버리라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찰나의 처세가 아니다.

고난의 눈물 골짜기를 지나 온 자의 통찰이다.


그러면서 죽음의 절망에서 해방된 자유혼 만이 외칠수 있는 기백으로

김태원은 당당하게 외친다. 

 
'가려무나 가려무나 모든 순간이 이유가 있었으니

세월아 가려무나 아름답게 다가오라 지나온 시간처럼' 

 
지나온 시련은 이유있는 시험이었다. 뜻이 있었다.

그러니 다가올 시간도 두렵지 않다.

어떤 시련이 또다시 온다 해도 뜻이 있을테니 말이다.

새로운 코스모스를 피울 이유가 되어줄테니 말이다.

이제 두려움은 없다.

시련에게 다가오라고 정정당당하게 노래하는 사람에게 시련이 주눅들어 도망가겠다.

그리움이란 단어에 깊고 도도한 위로를 담고

사랑과 소망이라는 단어에 보석처럼 단단한 비전을 담았다.

마치 창공을 향해 솟구쳐오르는 독수리의 우아한 활공을 보는 듯한다.


김태원은 상처입은 치유자다.

그의 성찰어린 고백에서 용기를 얻는다. 진짜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더하여'는 그리스도인인 내겐 성경의 한구절같은 가사이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어떤 악도 하나님과 함께라면 선으로 승화된다.

참 놀라운 노래가 세상에 나왔다.

내 영혼을 부활시키는 인생의 노래가 나왔다. 
 

이 놀라운 노래를 52세 이상 인생의 황혼을 향하는 장년들이 청춘의 이름으로 합창한다.

청춘은 가장 좋은 시절을 말할 것이다.

어떤 이는 암수술을 하고 노래하고

어떤 이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노래하며

어떤 어머니는 아들을 잃고 노래한다.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 청춘의 이름으로 노래한다.

단순히 가장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기 위해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 노래의 가사처럼 지나간 모든 시간속에 이유가 있었음을 믿고

장차 다가올 시간에도 이유가 있음을 믿고 노래한다.

청춘합창단은 아직 가장 좋은 시절은 오지 않았다고 노래하는 것 같다.

노래는 확실히 영혼의 일이다.

노래에는 사람을 살리고 인생을 회복시키는 위대한 힘이 있다.

노래하는 사람을 아무도 이기지 못한다.

고난도 심지어 죽음도 말이다.

그 증인들이 이 청춘 합창단이다.

노래하는 인생이 놀랍다.

노래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출처]인생의 노래, 청춘합창단, 사랑이라는 이름을 더하여 [작성자] 양구사람

도리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에

짧은 지식이나마 불교에서 바라보는 이 세상의 모습을 적어볼까 합니다.

 

많고 많은 하늘을 이야기하기 전에 윤회부터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부처는 깨달음을 얻어 윤회를 벗어난 존재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상태를 흔히 열반(니르바나) 또는 해탈(모크샤)이라 하는데

해탈은 불교 이전 인도에서 흔히 사용하던 용어라는 점을 알아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윤회를 하는 존재는 지옥, 수라, 아귀, 축생, 인간, 하늘이라는 

6가지의 양태 또는 장소에서 태어는데 이를 육도윤회라 하죠.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늘에서 태어나도 결국 윤회를 하는 존재이며

결코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부처는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신(神)과 같은 존재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육도윤회의 존재에 대한 설명은 잘 아시니까 과감히 생략하고

이 중에서 주요 포인트가 되는 하늘에 대해 이야기를 해봅시다.

 

지옥에서 인간과 하늘의 일부는 욕계에 있으며,

욕계 위의 색계와 무색계에도 하늘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하늘나라는 30층 정도의 아파트라고 보면 되는데

맨 아래 1층은 욕계의 가장 아래인 사천왕천이고, 2층은 도리천입니다.

1,2층은 땅 위에 솟아있는 수미산에 있고, 그 위로는 공중에 떠있는 하늘이라 하니

지하 1~2층이라면 더 이해하기 쉬울 지 모르겠네요.

욕계는 이렇게 6층까지 자리잡는데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순서입니다.

이런 하늘나라의 성격은 인터넷에서 검색해보시면 알 수 있으니 생략하고.

 

색계는 초선천, 제2선천, 제3선천, 제4선천이 있습니다.

초선천에는 범중천, 범보천, 대범천이 있는데 우리가 아는 범천이 사는 하늘이죠.

쉽게 말해 7층 101호, 102호, 103호의 주인들이라 하면 이해가 쉽겠죠.

제2선천 역시 소광천, 무량광천, 광음천이고...

제3, 제4선천 역시 이런 식으로 작은 하늘이 있다고 합니다.

 

색계 위에 무색계가 있어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라는 하늘이 있습니다.

 

도합 몇층일까요... 욕계 6천, 색계 4천, 무색계 4천인데

색계는 하늘 안에 또 작은 하늘나라가 있으니 약 30개가 됩니다.

크게 보면 14층 안에 호수가 다른 하늘이 있음이고

(아니면 복층 구조의 하늘이라고 해야 하나...)

복층의 하늘을 하나의 층으로 본다면 약 30여 층이 될 것 같네요.

 

이건 불교의 개념에서 하늘나라이니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욕계 맨 아래 인간으로 살아가는 도리가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幽玄 원글보기
메모 :

 

出典 : 明心寶監 (명심보감) 立敎篇(입교편) 第 四 章

         입교편(立敎編 : 교육계획 편)에는 윤리도덕(倫理道德)의 강령(綱領 : 일의 으뜸이 되는 줄거리)이 되는

         삼강오륜(三綱五倫 : 세 개의 벼리와 다섯 개의 인륜)을 비롯하여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방면에 걸쳐 근본을 설명하였다.

                                                                                                        

公子 三計圖 云 (공자가 삼계도에서 말씀하시기를,) 삼계도는 하루의 계획, 일년의 계획, 일생의 계획인 세가지 계획입니다.                          

一生之計 在於幼  일생지계는 재어유요   한 평생의 계획은 어릴때 설계되고 

(셈, 계산 계)字는- 

말씀 언(言)변에 열 십(十)으로 된 회의문자(會意文字)로 셈(計 device)이고 꾀인 모책(謨策 stratagem)을 말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걸맞는 해설이 있다. 말(言)이 많은(十) 것은 여러가지 생각 중에 제일 낳은 것을 얻으려는 것이다.

부분의 계획은 단기간이어서 멀리 내다보지 못한다. 원모(遠謨 : 멀리 내어다 보는 계획)가 있는 사람이 곧 현(賢人)이지오.

이론 물리학자들의 특성은 어릴 때에 일가견을 이루겠다고  다짐하여 매진해서 거의가 20대 초반에大家가 된다는 것이다.

 

어릴 때에 계획을 세운다는 말은 스스로가 꾀하기 보다는 앞선이들이 방향과 목표를 지향(指向)하는 것으로 곧 교육을 말한다.

이 삼계도(三計圖)를 가르친 공자는 배우지 않고 스스로 도(道)를 깨달은 사람이나 범인(凡人)을 위해서 밑그림을 제시했다.

 

 

一年之計 在於春  일년지계는 재어춘이고  일년동안의 계획은 봄에 세워지고

(봄 춘)字는-

음력으로 말하는 농경문화의 첫날로 양력으론 2 4立春(입춘)을 말한다. 사시절(四時節)로 보면 일년의 첫날이다.

 

영어로 spring은 문자 그대로 튀어 오른다는 뜻이니 새날이(日) 와서(來) 초목이 새로 싹이 튼다는 말과 같으니 재미있다.

일장춘몽(一長春夢 : 봄에 꾸는 덧없는 꿈)이란 말이 있는 걸 보면 봄에 새우는 계획은 참으로 이루기 힘든다는 뜻이 아닐까?

일장(一長)은 '그 자리에'란 뜻으로 '한 자리'고 춘몽(春夢)은 봄날에 나른해져서 꾸는 낮잠으로 오수(午垂)라 한다.

 

봄에 일년의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일년 동안의 농사(農事)를 짓는 데에 필요한 계획을 말하니 파종(播種)과 수확(收穫)의

일정을 세우고 제반 필요한 농기구나 밑거름 등 준비를 갖춰야 하는 것이다. 사람도 일년 주기로 몸을 관리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一日之計 在於寅 일일지계는 재어인이라,   하루의 꾀함은 새벽에 있는 것이니,

(동방 인)字는-

셋째 지지(地支)로써의 시(時)인 인시(寅時 : 새벽 3시에서 5시까지의 두 시간)를 말하고 또 공경하다는 인공(寅恭)이기도 하다.

설날 새벽에 제사지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하루의 시작인 시간은 이 시간대이니 일찌감치 계획을 세우는 것이네요.

 

일일난재신(一日難在新 : 하루에 아침은 두 번 오지 않는다)이라 하였으니 내일이 있고 모래가,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아라.

일촌광음 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 : 일분 일초라도 세월을 아껴라)이라 하였으니 눈에 불이나고 다리가 저리도록 뛰어야지오.

눈이, 다리가 풀려 허우적거리지 말아란 뜻이다. 다대포 넌 어떻느냐고요? 늦어도 새벽 네시 이전에 눈떠서 컴한다, 와~!

 

 

  

幼而不學 老無所知  유이불학이면 노무소지요 어릴때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얻을 게 없고

한문으론 설날은 '어리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릴 때에 셰운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네요.

깨우칠, 알 지(知)字는 화살의 살(矢 시) 변에 입 구(口)字로 된 회의문자입니다. 매서운 가르침이 깨닫게, 알게 한다는 글자지오.

 

know보다는 preception이 본래의 뜻에 가까운 말이다. 글 뜻은 허황되고 거짓되지 않은 참된 말이니 그 '앎'의 뜻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엉터리 지식은 지(知)의 뜻에 반(反)한다는 말이지오. 지금의 세상은 곡학아세(曲學我說)하는 선생들이, 학자들이 많다.

 

위 문장은 주자십회(朱子十悔)에 나오는,

소불근학노후회(小不勤學老後悔 : 어릴때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후회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지난번 해설 했는데,  배울 (학)은 들어 올릴 (거)에다 아들(자)이니 자식이 잘 되어 노후가 편케 될려면

어릴때 가르쳐라는 사역동사가 곧 배울 학(學)字이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특히 한문을(늙어선 한문이 잘 익혀지지 않는다).

     

春若不耕  秋無所望   춘약불경이면 추무소망이고   봄에 밭갈고 씨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걷을께 없고

( 같을, 꼭 약)字는-         

"만일에~.만약에~'란 말로 영어에 나오는 'if 用法'과 같은 글자입니다. 그럴리 없지만은 만약에 씨 뿌리고 밭 갈지 않으면

가을에 빈 손이어서 추운 겨울에 먹을 게 없을테니 알아서 기어라고 경고하는 말이로군요. 일녀 계획도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바랄 망)은 '한 달 내내 기다린다'란 글자라고 말씀 드렸지오? (가을 추)는 벼, 나락이(禾) 가을 볕에(火) 익었다는 말입니다.

 

역시 주자십회에 나오는,

춘불경종 추후회(春不耕種 秋後悔 :에 밭갈고 씨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후회한다.)과 같은 말입니다.

천만번 지당한 말씀이지오. 어릴 때 건강하게 키워야 늙어도 잔병 않는다는 말이고, 어릴 때 건전하고 올바른 사고방식을 들여야 

나이들어 교도소에 들어 앉아 때늦은 후회 않을 것이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설날과 봄은 '어린아이'라는 뜻도 있다고 했지요?

                              

寅若不起 日無所辨   인약불기면 일무소변이니라. 새벽녘에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그날의 할 일이 없느니라.

(일어날, 설 기)字는-

내가(己 ; 몸 기) 36계 줄행랑 칠 주(走)로 된 글자로 된 형성문자입니다. 설날은 새벽이다. 寅時(인시 : 3~5시)에 일어나야한다.

영어론 손님 맞는다는 뜻인 리셉션이다. 조균부지회삭(朝菌不知晦朔 : 아침에 생겨나 저녁에 죽는 버섯)이란 말은

'일찍 시작했으나 끝이 안보여 덧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때를 놓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더 무서운 말입니다.

 

 

 

   

 

 

 

                             7년 만에 만난 친구 부부

 

 

 

많은 시간이 흘렀으나, 이 친구 부부는 아직도 다정한 모습 그대로다.

부부애도 아직 그대로인 것 같다. 대구에서 근무할 때에 같이 근무하다가

이제는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게된 친구인데....

 

 

7년 만에 만나게 되었다.

서로 소식은 알고 또 전화도 했지만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이 딱 7년이 흘렀다.

 

 

평창에서 버스로 목포로 와서 배로 제주에 도착해 1박하고 새벽 5시에 성판악에서

출발하여 정상을 올랐다가 관음사코스로 하산을 한 후, 다시 역순으로 배와 버스를

타고 평창에 도착하면 새벽 2시가 된다고하니...

 

 

말이 그렇지 강행군이다.

오래 붙잡고 이런 저런 얘기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친구 부인이 걱정을 많이해서, 빨리 헤어지고 말았다.

아무튼 즐거운 산행이 되었길 바라고 늘 건강하게 잘 지내길...

 

 

 

 

 

 

 

 

출처 : 꿈에 본 복숭아꽃~~
글쓴이 : 희망시인 원글보기
메모 : 참으로 반갑게 대해준 제주에서 근무하는 동기생 희망시인께 감사드리며 예쁜 글 스크랩해 왔습니다.

 

-=- 욕계(欲界) -=-

욕계에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육욕천(사천왕,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이 있습니다. 욕계의 중생들은 삼독에 찌들려, 욕심이 꽉 차서 괴로워하고 있다고 합니다.

-=- 육욕천(六欲天) -=-
육도(六道)로 보면 천(天)에 속하나 아직까지 욕심을 떠나지 못한 세계이므로 삼계로 나눌 때는 욕계에 넣게 됩니다.

1. 사왕천(四王天)
사대천왕이 있어 사주를 수호하며 그 권속들과 살고 있다고 합니다. 사대천왕이란, 동주를 주로 수호하는 지국천왕, 남주를 주로 수호하는 증장천왕, 서주를 주로 수호하는 광목천왕, 북주를 주로 수호하는 다문천왕의 넷을 말합니다.
이곳에도 남녀의 구별은 있어 혼인하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몸과 몸을 가까이 하여 기운으로써 음양을 이루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1-2세와 같고 키는 반유순이라고 합니다.
큰 절에 가면 입구에 천왕문(天王門)이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곳은 사대천왕을 모신 곳으로 불법을 수호하고 밖에서 오는 삿된 마귀를 방어하는 뜻에서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2. 도리천(利天)
33천이라고도 합니다. 이 도리천을 33천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중앙에 도리천의 왕인 제석천왕이 있는 선견성(희견성이라고도 함)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에 각기 8성씩 32성이 있어 도합 33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2-3세 같으며 자연히 화현하여 천(天)에 앉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의 왕인 제석천왕은 사천왕과 삼십이천을 통솔하면서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이들을 보호하고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한다고 합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 어머니인 마야부인을 위해 석달 동안 올라가 설법하고 내려오셨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하는 하늘입니다.
육욕천 중에서 사왕천과 도리천의 둘은 수미산을 의지해 있기 때문에 지거천(地居天)이라고 하는데 사왕천은 중턱에, 도리천은 정상에 있다고 합니다.

3. 야마천(夜摩天)
사왕천과 도리천이 지거천(地居天)임에 반하여 야마천부터는 공중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공거천(空居天)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때에 따라 오욕락을 받는다고 합니다. 도리천 보다 수승한 하늘로, 남녀가 음양을 이룰 때에는 서로 가까이만 해도 되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3-4세와 같다고 합니다.

4. 도솔천(兜率天)
지족천(知足天), 희족천(喜足天), 묘족천(妙足天)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는 자기가 받는 오욕락에 스스로 만족한 마음을 내어 안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선 남녀가 서로 손을 잡는 것으로도 음양을 이룬다고 하는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4-5세와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엔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이 있는데 외원은 천인들의 욕락처가 되고,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로서 미륵보살은 이곳에 있으면서 남염부주에 하강하여 성불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도솔천 내원궁에서 호명보살로서 천인들을 교화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5. 화락천(化樂天)
오욕의 경계를 스스로 변화하여 즐기기 때문에 화락천이라고 합니다. 남녀가 바라다 보고 있으면 음양을 이룬다고 하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5-6세와 같다고 합니다.

6.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이 하늘은 남의 즐거운 일들을 자유롭게 자기의 락으로 삼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합니다. 이곳에선 잠시 바라만 보아도 음양을 이룬다고 하며 처음 태어났을 때에는 인간의 6-7세와 같다고 합니다. 욕계는 이 타화자재천에서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경에 의하면 남녀의 구별이 있는 것도 혼인하는 일이 있는 것도 여기까지라고 합니다. 이 이상의 하늘엔 남녀의 구별도 없다고 하니 혼인하는 일도 있을 수 없습니다. 

< 퍼 온 글 입니다.>

무열왕 김춘추의 생부는 과연 누구인가?

 

태종 무열왕의 초상화

 

진평왕의 품에 안겨 있는 김춘추. 드라마 <선덕여왕>.

 

 

진평왕(조민기 분)이 차기 후계자로 점찍은 김용수(진지왕의 장남)가 공을 세우기 위해 참전했다가 사망한 이후, 용수의 부인인 천명공주(신세경 분)는 불가에 귀의하겠다면서 신라 궁궐을 떠났다.

승려가 된 천명공주는 사찰에서 아들 김춘추를 낳았고, 사찰을 방문한 김용춘(용수의 동생)은 조카의 얼굴을 처음 보며 반가워했다. <선덕여왕> 제6부에서 방영된 이야기다.

 

6월 16일 방영된 <선덕여왕> 제8부에서 천명공주는 천신만고 끝에 1년 만에 궁궐로 돌아와 김춘추를 부모의 품에 안겼고, 오랜만에 남자 왕족을 얻은 진평왕 부부는 "용수의 아들!"이라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묘사된 위의 상황은 상당히 미묘한 의미를 갖는 사안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사료상으로 불투명했던 미묘한 문제를 '아주 명쾌하게' 판정했기 때문이다.

 

그 미묘한 문제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김춘추의 생부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삼국시대의 가장 유명한 왕들 중 한 명이라서 혈통에 관한 기록이 상세히 남아 있을 법도 하지만 사료의 기록태도가 불분명하여 판단을 유보해둘 수밖에 없었던 김춘추의 생부에 관한 문제를, 드라마 <선덕여왕>이 아주 명쾌하게 판정해 주었다. 김춘추의 아버지는 용수라고….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는 누구?

 

그러나 이 문제는 드라마에서처럼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기존 사료들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먼저, 김부식의 <삼국사기> 권5 '태종왕 본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태종무열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춘추이고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일설에는 용수]의 아들이다(<당서>에서는 진덕의 동생이라고 하지만, 잘못이다)."(太宗武烈王立, 諱春秋, 眞智王子伊?龍春[一云龍樹]之子也[唐書以爲眞德之弟, 誤也]

 

참고로, [ ]는 <삼국사기> 원문의 주석을 가리킨다. 오늘날에는 페이지의 맨 밑에 일괄적으로 각주를 붙이지만, 과거에는 해당 글자의 바로 밑에 작은 글씨로 주석을 달았다. 

 

위의 <삼국사기> 본문에서는 '김춘추는 용춘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주석에서는 '일설에는 용수의 아들이라고도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용춘과 용수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 용춘 외에 용수라는 사람이 따로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용춘의 또 다른 이름이 용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삼국유사>의 기록태도는 좀 다르다. <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에서는 "용춘을 용수라고도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용수는 용춘의 또 다른 이름이 되는 한편, 용춘과 용수가 별개의 사람일 가능성은 없어진다.

 

두 사료의 내용을 종합하면, 김춘추는 용수라고도 불리는 용춘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지만 용춘이 아닌 용수라는 또 다른 인물의 아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용춘과 용수 양쪽에 모두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그래도 용춘 쪽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 기존 사료의 기술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용춘 쪽에 비중이 실리긴 했지만 기존 사료의 기술태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유명 포털 백과사전의 '김춘추' 항목에서는 "용춘(龍春:龍樹)의 아들"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했다. '용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도 괄호 안의 한자에서는 용춘과 용수를 함께 표기해 놓은 것이다. 이 점은, 학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어느 <삼국유사> 번역문 데이터베이스에서도 마찬가지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달라지는 김춘추의 아버지

 

그런데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김춘추의 아버지는 용수이며 용수는 용춘의 형'이라고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했다. 무슨 강조라도 하려는 듯이, <선덕여왕> 제8부에서 천명공주의 부모인 진평왕 부부는 "우리 천명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용수를 거명하면서 "용수의 아들!"이라며 여러 번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는 <선덕여왕>의 작가가 이 문제에 대해 그만큼 '확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덕여왕>의 이 같은 인물 설정은 위작 논란이 있는 현존 <화랑세기>(필사본)에 근거한 것이다. <화랑세기>(필사본)의 18세 풍월주 춘추공 기사에는 "아버지인 용수공이라는 사람은 금륜왕(진지왕)의 아들이다"(父龍樹公者, 金輪王之者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위의 "아버지 용수공이라는 사람은"(父龍樹公者)이라는 부분과 관련해 어느 유명한 현존 <화랑세기> 번역서의 경우, 원문 코너에는 "父龍樹公者"이라고 표기했으면서도 번역문 코너에는 "아버지는 용춘공"이라고 표기해놓았다. 원문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탈자가 생긴 듯하다. 그래서 그 번역서의 그 부분만 읽을 경우에는 '현존 <화랑세기>(필사본)에서는 김춘추의 아버지는 용춘이라고 기록했다'라고 잘못 이해할 수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한편, <화랑세기>(필사본)의 제13세 풍월주 용춘공 기사에서는 용춘과 용수가 전혀 별개의 사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위와 같은 현존 <화랑세기>(필사본)를 토대로 할 때, 김춘추의 아버지는 확실히 용수이며 용수는 용춘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앞에서 살펴본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내용과 함께, 위작 논란이 있는 현존 <화랑세기>의 내용까지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삼국유사>와 현존 <화랑세기>(필사본)는 명확히 상반된다는 점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용춘과 용수가 동일인이라고 했지만, 현존 <화랑세기>에서는 용춘과 용수는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둘째, <삼국사기>와 현존 <화랑세기>(필사본)는 해석 여하에 따라 상반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일설에는 용수"라는 <삼국사기>의 표현을 '일설에는 용춘이 아닌 용수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두 사료의 내용은 일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에 반해, "일설에는 용수"라는 표현을 '일설에는 용춘을 용수라고도 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두 사료는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천명공주는 용수가 아닌 용춘을 더 사랑했다?

 

위와 같이 김춘추의 생부가 누구인지를 가리는 일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삼국시대의 가장 유명한 왕 중 하나인 김춘추의 혈통에 관한 기록이 이처럼 불투명한 것은 좀 의외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유감스럽게도,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는 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현실적으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현존 <화랑세기>(필사본)의 내용까지도 다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춘추의 생부가 누구인가'라는 이 난해한 문제보다 더 흥미로운 문제가 있다. 그것은 '김춘추의 생부를 판정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들까?'하는 문제다.

 

김부식이 '김춘추는 용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도 주석에다가 '일설에는 용수라는 말도 있다'고 한 것은 김부식(1075~1151년)이 살던 시대에도 김춘추의 생부에 관한 논란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삼국유사>를 쓰기 전에 <삼국사기>를 읽었을 일연(1206~1289년)이 김부식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용춘과 용수는 동일인'이라며 김부식과 약간 다르게 기술한 것은 일연의 시대에 또 다른 관점이 나올 정도로 김부식 사후에도 이 논쟁이 계속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만큼 이 문제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김부식과 일연이 헷갈렸을 정도로 김춘추의 생부 문제가 복잡한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어떤 속사정이 있을까?

그런데 현존 <화랑세기>(필사본)를 읽다 보면, 이 문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현존 <화랑세기>(필사본)의 13세 풍월주 용춘공 기사에서는, 천명공주가 용수와 결혼을 하기 이전부터 그리고 결혼을 한 이후에도 여전히 용춘을 더 많이 사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루는 천명공주가 은밀히 용춘에게 "첩이 본래 사모한 사람은 당신"이라고 고백한 적도 있다고 한다. 또 천명공주의 어머니인 마야왕비가 주선해 천명공주와 용춘이 함께 잠을 잔 적이 많으며, 용수 역시 그런 낌새를 알아채고 스스로 자리를 비켜주곤 했다고 한다.

 

이러한 현존 <화랑세기>(필사본)의 내용을 놓고 보면, 낮에는 용수가 천명공주 옆에 있는 때가 많았고 밤에는 용춘이 그 옆에 있는 때가 많았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천명의 공식적인 남편은 용수이지만 실질적인 남편은 용춘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용수와 용춘이 환생하면 답을 들을 수 있을까

 

만약 현존 <화랑세기>(필사본)가 정말로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책이라면, 우리는 김춘추의 아버지가 용춘이냐 용수냐를 두고 오래도록 논란이 전개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천명공주가 용수·용춘 두 형제와 동시에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천명공주가 낳은 김춘추의 생부에 관한 논란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현존 <화랑세기>(필사본)가 진짜라면, 일처다부와 일부다처가 뒤섞여서 한 사람이 여러 명의 파트너를 두고 그 여러 명 중의 한 명도 동시에 또 다른 여러 명의 파트너를 두었던 신라 왕실 및 지배층의 성풍습 하에서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공주가 용수·용춘 두 형제와 동시에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서는 김춘추의 생부가 누구인가를 놓고 의혹의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당사자 중 하나인 용수와 용춘이 환생한다 해도 그들로부터 명확한 해답을 들을 수 없을지 모른다. 또 다른 당사자인 천명공주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좀 더 사실에 가까운 답을 들을 수 있겠지만, 어쩌면 그 역시 정확한 진상을 몰랐을 수도 있지 않을까.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2009.6.17>

 

미실(美室)!  그는 어떤 여자인가?

신라를 말하는 `색공지신 미실

 

 

MBC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

 

 

 

진평왕 재위 28년째인 서기 606년 가을 7월, 신라 제7대 풍월주(風月主. 화랑 집단의 우두머리)인 설화랑(薛花郞)이 졸(卒)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화랑세기(花郞世記)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 때 미실궁주(美室宮主)가 기이한 병(奇病)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날 수 없었다. 공(公=설화랑)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면서 미실의 병을 자기가 대신해 달라고 밤에는 반드시 기도하니 마침내 (설화랑이) 그 병을 대신했다." 이렇게 해서 진흥왕 재위 10년(549)에 태어난 설화랑은 그가 평생의 연인으로 생각했던 미실(美室)이라는 여인을 뒤로 하고 58세로 선화(仙化)했다.

한데 그 몇 달 뒤에 미실 또한 숨을 거뒀다.

이 대목을 화랑세기는 "(병에서) 일어나 (설화랑이 먼저 죽은 줄 알고는) 슬퍼하며, 자기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으니 그 때 나이 58세라고 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미실은 그가 생전에 색(色)으로 녹인 수많은 남자 중에서도 끝까지 신의를 배신하지 않은 설화랑과 생몰년이 모두 같다.


미실(美室). 이름부터가 묘하다.

실(室)이란 궁(宮)과 함께 여성의 성기를 암시하는 대표어. 그것이 아름답다 했으니 오죽 방중술(房中術)이 뛰어났을까.

화랑세기에 의하면 이 미실이라는 뛰어난 미모와 그것을 능가하는 가무(歌舞), 또 그것과 비견되는 천재 문학가였으며, 이런 무기들을 발판으로 진흥-진지-진평으로 이어지는 3대 왕과,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은 물론이고 6대 풍월주인 세종(世宗)과 7대 풍월주 설화랑과도 농밀한 육체적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그에게 첫 애인은 15,6세에 요절한 화랑 사다함이었다. 왕이나 태자는 당시 신라왕국에서는 더 이상 넘볼 곳이 없는 지존(至尊)들이니, 이들을 대상으로 삼은 미실의 섹스 행각을 화랑세기는 `색공"(色供)이라고 표현한다.

화랑세기 한 대목에는 미실이 31세 무렵, 진흥왕 손자인 진평이 13살로 즉위하자마자 어린 왕을 도(導)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끈다는 의미인 도(導)는 말할 것도 없이 도교신학에서 벽곡법(오곡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 식이요법)ㆍ도인술(導引術. 기체조)과 함께 불로장생을 위해 권장되는 육체 수련술 중 하나인 방중술, 즉, 섹솔로지(sexology)를 의미한다.

실제 그의 아들인 보종(寶宗)은 "콩죽을 즐겨 먹고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도교의학사에서 황제를 성교육하는 현녀(玄女)나 소녀(少女)가 그랬던 것처럼 미실은 어린 제왕이 성적 능력을 배양케 하는 개인교사였던 것이다.

이 개인교사의 수강생은 진평뿐만 아니라 그의 할아버지인 진흥, 그의 아버지인 동륜, 그의 삼촌인 진지도 예외가 되지 않았다. 방중술가로서 우뚝한 미실의 행적은 그와 밤을 보낸 세종이 다음날 휘청거리곤 했다는 대목에서 읽을 수 있다.

 

이런 미실에게 무엇이 주어졌을까?

말할 것도 없이 막강 권력이었다. 그의 이런 면모 중 하나로 진흥왕 말년, 풍병(약물 과다 복용에 따른 중독 증세)으로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해진 왕을 대신해 미실이 국사를 농단했다는 대목을 들 수 있다.

법흥왕-진흥왕 시대를 대표하는 훈신(勳臣)인 미진부(未珍夫)의 딸이며, 10세 풍월주인 미생(美生)의 한 살 위 누이이자, 11세 풍월주인 하종(夏宗)과 16세 풍월주인 보종(寶宗)의 어머니(이들 아들은 씨가 다 다르다)가 되며, 저 유명한 김유신에게는 처조모가 되는 미실.

근간 `색공지신(色供之臣) 미실"(푸른역사)에서 서강대 사학과 이종욱 교수는 화랑세기에는 거의 전면에 노출돼 있으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기존 문헌에는 전혀 종적이 남아있지 않은 미실의 행적을 추적하고 정리한다.

왜 하필 미실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미실 자체가 신라로 들어가는 열쇠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일생을 통해 신라왕실의 권력 작동 시스템이라든가 그 왕조를 지탱한 사회구조가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종욱 교수, 미실의 행적 추적해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치맛자락 하나로 천하를 뒤덮은 경국지색 미실


 

 

 

 

 

 

진흥왕 중반기에서 진지왕 대를 거쳐 진평왕 초기 10년까지 약 40여 년간의 신라 정치는 미실이라는 한 여자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미실이라는 여자는 어떤 과정을 거쳐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을까?

그 배경엔 신라의 특이한 문화와 신라 여성네들의 독특한 삶, 그리고 미실의 남다른 성장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미실은 제2세 풍월주 미진부의 딸이다. 미진부의 아버지는 아시공이며 어머니는 법흥왕과 소지왕의 후궁 벽화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삼엽 궁주이다. 법흥왕은 정비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후비 옥진궁주에게서 아들 비대를 얻었는데 그는 비대에게 왕위를 계승하려 했다.

하지만 법흥왕의 정비 소생의 딸 지소 부인은 비대의 어머니 옥진이 골품이 없기 때문에 비대는 태자가 될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아시공과 삼엽 궁주가 지소 부인을 지지하고 옥진의 아버지 위화랑이 또한 지소를 지지함으로써 비대의 왕위 계승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대신 지소 부인과 입종(법흥왕의 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삼맥종(진흥왕)이 왕위를 이엇다.


진흥왕이 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지소 부인은 섭정으로서 정권을 장악했다. 더불어 진흥왕의 즉위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아시공과 삼엽은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

또한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미진부 역시 16세의 어린 나이로 태후의 폐신(총애를 받는 신하)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미진부는 법흥왕과 백제 동성왕의 딸 보과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남모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초대 원화인 준정이 자기가 차지해야 할 원화 자리가 남모에게 넘어가는 것을 질투하여 남모를 물에 빠뜨려 죽이는 바람에 아내를 잃었다.

그후 미진부는 한동안 아내를 맞이하지 않았다. 미진부는 법흥왕의 후궁이며 위화랑의 손녀인 묘도와 몰래 사통하고 있었다. 지소 태후가 그 사실을 알고 묘도를 미진부에게 시집보냈다. 그들 사이에 1남1녀가 생겼는데 미실과 남동생 미생이 그들이다.


미실이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한 후 처음으로 만난 남자는 세종이었다. 세종은 지소태후와 박이사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데, 지소태후는 세종이 성장하자 미녀들을 뽑아 궁중에 모아 두고 세종에게 마음에 드는 여자를 선택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세종은 미실을 택했다.

하지만 지소 태후는 미실을 꺼렸다. 지소 태후는 법흥왕의 명령으로 방영실을 계부로 맞아들였는데 지소 태후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태자가 없던 법흥왕은 원래 영실을 부군으로 삼아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일 이후 지소 태후는 영실을 몹시 싫어했다. 법흥왕이 그를 계부로 삼으라고 하자 더욱 싫어했다.

그런데 미실이 박영실과 인천 관계였으니 지소 태후가 그녀를 꺼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사부의 충고로 미실을 받아들여 세종의 아내로 삼았다.


그런데 이때 지소 태후는 자신과 이사부 사이에서 태어난 숙명을 진흥왕의 왕비로 삼고 정비 사도부인 박씨를 내?으려 했다. 사도 또한 박영실의 딸이어서 그녀와 미실은 인척 관계였다.

그래서 지소태후는 사도 부인에 대한 미움이 미실에게까지 연계했고 결국 미실을 궁에서 내치기에 이르렀다.

궁궐에서 ?겨난 미실은 또 한 명의 남자를 만나는데, 유명한 화랑 사다함이다.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이며 비량의 손자이다. 비량은 위화랑의 누나 벽화를 사랑했는데 당시 벽화는 소지왕이 죽은 뒤에 법흥왕의 후궁이 되어 있었다.

비량과 벽화는 서로 사랑하여 몰래 사통하였는데 그들은 늘 벽화궁의 뒷간에서 만나 정을 통하였다. 그래서 낳은 아들을 구리지라 했으니 이는 '구린 데서 낳은 아이'라는 뜻이다. 구리지는 위화랑의 둘째 딸 금진과 결혼하여 토함.새달.사다함을 낳았다.


사다함은 열두 살에 화랑도에 입문하여 문노에게 격검과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561년에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가야 정벌 전쟁에 출전하여 큰 공을 세우고 제5세 풍월주가 되었다.

미실과 사다함이 사랑에 빠진 것은 사다함이 가야 정벌 전쟁에 출전하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흠모하며 사통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미실을 잃은 세종은 모후의 명령으로 진종의 딸 융명과 결혼했으나 마음을 잡지 못했다. 그는 융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늘 미실만 동경하였다. 그 무렵 미실과 사다함의 사라은 더욱 깊어져 마침내 서로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미실은 진흥왕을 찾아가 사다함과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결국 허락을 받아 냈다.

그런 상황에서 사다함이 전쟁에 나가게 되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사다함은 용명이 뛰어나고 무술이 탁월하여 귀당비장에 임명되어 출전했다. 전장으로 떠나는 사다함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미실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바람이 불어도 임 앞엔 불지 마오.

물결이 쳐도 임 앞엔 치지 마오.

어서 돌아와 다시 만나 안고 보오.

아아,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떼라니요.


하지만 그것이 정말 영영 이별의 노래가 될 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미실과 사다함이 서로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세종은 식음을 전폐하고 미실의 이름만 불러 댔다.

결국 아들의 건강을 염려한 지소태후가 미실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그 명령이 떨어지자 세종은 미친 듯이 좋아하며 미실의 숙소로 달려갔다. 그러나 미실은 세종과의 관계를 거부했다. 이미 세종이 정식으로 융명을 아내로 맞이한 터라 미실은 첩의 신분으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미실은 첩이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색공에 응하지 않았다.

세종은 지소 태후에게 달려가 미실을 부인으로 삼도록 해 달라고 졸랐다. 지소태후는 별수없이 미실을 정부인으로 삼고 융명을 후부인으로 삼았다. 그러자 융명이 불만을 표시하며 궁을 나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지소 태후는 미실에게 향후에라도 세종을 배반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은 다음 융명을 궁 밖에 나가 살도록 허락했다.

그 얼마 뒤에 사다함은 승전보를 안고 돌아왔다. 그는 미실과 결혼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돌아와 보니 미실은 다시 세종의 부인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사다함은 그 슬픔을 이렇게 노래했다.


파랑새여 파랑새여 저 구름 위의 파랑새여

어이하여 내 콩밭에 내렸는가

파랑새여 파랑새여 내 콩밭의 파랑새여

어이하여 다시 날아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며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왜 왔는가

공연히 눈물 짓게 하고 상심하여 여윈 끝에 죽게 하려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이 될까. 나는 죽어 신병이 되리

그래서 그대에게 날아들어 수호신이 되어

아침 저녁으로 전군부처(세종과 미실) 보호하리

만년 천년 죽지 않도록


사다함은 그녀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를 잃은 슬픔이 뼈와 살에 사무쳐 그 상심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날로 여위더니 7일 만에 죽어 버렸다. 사다함이 죽은 뒤에 미실의 남편 세종이 화랑도의 풍월주가 되었다.

한편 미실은 사다함의 사망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그래서 천주사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날 밤 미실의 꿈에 사다함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와 네가 부부가 되길 원하였으니, 나는 너의 배를 빌려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 뒤로 미실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으니 그가 제11세 풍월주 하종이다.

사람들은 미실이 입궁하기 전에 이미 사다함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고 했다. 사다함이 죽은 뒤에 미실은 변하기 시작했다. 이미 사랑을 잃은 그녀에겐 더 이상 순정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색정과 권력욕 뿐이었다.


미실은 당시 진흥왕의 태자였던 동륜 태자와 사통하였는데 이는 동륜의 어머니 사도 왕비가 주선한 일이었다. 사도 왕비는 지소 태후가 자신의 딸 만호와 동륜 태자를 시키려 하자 미실을 동륜에게 붙여 그 마음을 빼앗고자 했던 것이다.

사도 왕비는 미실에게 자식을 잉태하면 태자비가 되게 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하였다. 미실은 크게 기뻐하며 기꺼이 동륜과 가까이 했다. 그리고 마침내 임신을 하였다.

그런데 진흥왕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미실을 불러 자신을 섬기도록 명령했다.

미실은 음사에 매우 능하고 음악과 춤에도 뛰어났기 때문에 진흥왕은 그녀에게 쉽게 빠져들었다. 덕분에 그녀는 황후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사도 왕비가 원한 일이었다. 사도 왕비는 자신은 물론이고 미실과 보명 등 여러 여자를 동원하여 진흥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흥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게 된 미실의 힘은 어느덧 남편인 세종을 능가하게 되었다.

그쯤 되자, 그녀는 세종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래서 진흥왕을 움직여 세종을 전장에 내보내 버렸다. 세종이 떠난 뒤, 미실은 진흥왕에게 원화제도를 부활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원화는 화랑도가 생기기 전에 풍월주의 위치에 있었던 여자를 지칭하는데, 미실은 스스로 원화의 자리에 오르고자 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풍월주는 없어지고 원화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진흥왕은 미실의 요청대로 풍월주를 폐지하고 원화를 복원하였다. 그리고 그녀를 원화로 삼았다.

이에 전장에 나가 있던 세종의 낭도들이 크게 반발하자 세종은 미실을 생각하여 그 낭도들을 이렇게 타일렀다.


"새로운 원화는 나의 옛 부인다. 너희들은 불평하지 말고 잘 섬기도록 하라."


그 뒤로 낭도들이 그녀에게 순종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궁궐에선 왕후의 권력을 얻었고 궁 밖에선 풍월주의 권력을 얻었다. 이때가 진흥왕 재위 29년(568년)으로 미실의 나이 스무 살 무렵이었다.

 

원화가 된 미실은 설원랑과 미생을 봉사랑으로 삼았다. 설월랑은 후에 제7세 풍월주가 되는 설화랑인데 위화랑의 차녀 금진이 설성이라는 낭도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다. 또한 미생은 미실의 친동생이다. 미실은 설원랑은 물론이고 친동생인 미생과도 정을 통하고 있었다.

거기다 미실은 동륜 태자와도 계속 관계를 갖고 있었다. 미실은 동륜을 원하지 않았지만 동륜은 미실과 관계를 가진 뒤로 그녀를 잊지 못하고 늘 합궁할 기회만 노렸다.

미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진흥왕이 알게 될까 염려하여 동륜을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륜은 무턱대고 찾아와 요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동륜의 요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미실은 자기가 거느린 유화 중에 미인들을 골라 동륜에게 붙여 줬다. 그러자 동륜은 색광이 되어 툭하면 궁궐 밖으로 나가 미생과 어울러 다니며 황음을 일삼았다. 색정에 사로잡힌 동륜은 미인이라는 미인은 모두 찾아다니며 색을 즐겼고, 그러다가 진흥왕의 후궁인 보명 궁주까지 넘보게 되었다.

보명은 미실 때문에 그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으나 동륜은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결국 관계를 허락했는데 그 뒤로 동륜은 출입이 잦았다.

하루는 동륜이 홀로 보명궁의 담을 넘었는데 그것이 죽음을 재촉한 일이었다. 큰 개들이 보명궁의 담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동륜이 월담을 하다가 개에게 물려 죽은 것이다. 이때가 572년이었다.


이일로 궁궐은 발칵 뒤집혔고 진흥왕은 노발대발하며 사건의 진상을 캐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동륜이 낭도들과 어울러 황음을 일삼는 행각들이 들춰졌고 그 낭도들은 대개 미실의 수하들임이 밝혀졌다.

그 사건으로 분노한 진흥왕은 미실을 궁궐에서 내?고 원화의 직위에서도 해임시킨 뒤, 세종을 불러 다시 풍월주에 앉혔다. 하지만 미실은 세종이 다시 풍월주의 자리에 앉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고 그에게 풍월주에게 물러나라고 종용했다.

미실은 자기의 정부인 설원랑이 풍월주가 되길 원했던 것이다. 세종은 미실의 강압에 못 이겨 설원랑에게 풍월주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미실이 굴궐에서 내?기자 이번에는 진흥왕의 둘째 아들 금륜(진지왕)이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미실은 금륜을 꼬드겨 그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을 다시 궁궐로 불러 줄 것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흥왕이 다시 미실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진흥왕은 그녀의 뛰어난 색사를 잊지 못했던 것이다.

그 무렵, 진흥왕은 지나친 정력 소비로 몸이 극도로 약해진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다시 미실과 색사를 즐기게 되자, 더 이상 몸이 버티지 못하고 풍질에 걸렸다.

진흥왕이 중풍에 걸린 뒤로 왕권은 사도 부인과 미실이 장악했고 조정의 인사도 그녀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리고 진흥왕은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576년에 마흔세 살의 나이로 죽었다.

왕이 죽었지만 사도부인과 미실은 그 사실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 그들은 일단 권력을 안정시킨 뒤에 진흥왕의 죽음을 알릴 심산이었다.


그래서 우선 세종.미실.설원랑.노리부 등을 불러 조정을 안정시킨뒤, 금륜을 찾아갔다. 그들은 금륜에게 왕위에 오르더라도 자기들을 저버리지 않을 것과 미실을 왕후로 삼을 것을 약속받은 뒤에야 진흥왕의 죽음을 알렸다.

그러나 금륜(진지왕)은 왕위에 오른 뒤 그들과의 약속을 저버렸다. 미실을 왕후로 삼지도 않았고 그들의 말에 순종하지도 않았다. 진지왕은 오직 궁궐 밖을 휘젓고 다니며 황음을 일삼았고 민가의 처자들을 함부로 범하는 추태를 보였다.


그러자 미실과 사도 태후는 그를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세종을 불러 은밀히 대책을 논의하였다.

문제는 문노의 낭도들이었다.

당시 화랑도는 크게 미실파와 문노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데 미실의 사주를 받고 세종이 주도하여 진지왕을 폐위할 경우 문노파의 반발이 예상되었다.

만약 문노가 반발하여 내전이 일어나면 큰 혼란이 야기될 게 뻔했다. 미실과 사도 태후는 이런 혼란을 미연에 방지할 요량으로 한가지 계책을 마련했다.

원화제도를 복원하여 미실을 원화로 삼고 세종과 문노의 낭도를 합쳐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종을 상선, 문노를 아선, 설원랑과 비보랑을 좌우봉사화랑, 미생을 전방봉사화랑으로 삼았다. 당시 문노의 낭도들은 평민 출신이 많았는데 이대의 조치로 신분의 제약을 뛰어넘어 고관에 발탁된 인사가 많았다.


이렇듯 사전 작업을 한 뒤 사도 태후는 자기 오빠인 박노리부를 시켜 거사를 감행하도록 했다. 물론 거사에 앞장선 세력은 세종과 그 낭도들이었다.

반정이 일어나자 진지왕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허무하게 포박되었다. 그리고 별궁에 잠시 유페되었다가 곧 죽음을 당했다. 진지왕을 죽인 사도 태후는 자기의 손자 백정(진평왕)을 왕위에 앉혔다.

 

당시 진평왕은 열세 살의 어린 나이였는데 사도 태후는 진흥왕의 후궁이었던 보명과 미실로 하여금 진평왕과 관계하도록 하였다.

미실은 당시 서른이 넘은 나이였고 보명보다 골품이 낮은 터라 보명에게 양보했다. 하지만 보명은 임신 중이었기에 사양하였다. 덕분에 미실은 열세 살의 어린 소년 진평왕에게 첫 경험을 안겨다 주는 영광을 얻었다.

이후 진평왕은 보명과 미실을 좌우 후로 삼았고 미실은 어린 진평왕을 끼고 정사를 좌지우지 했다. 진평왕이 즉위한 579년부터 미실이 죽은 607년까지 20여 년간은 미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흥왕 즉위 10년 - 지소태후의 시대

진평왕 즉위 20년 - 미실의 시대


진평왕이 즉위한 후 미실은 원화로 있으면서 화랑도를 원격 조정했다. 당시 화랑도는 최대의 군대 조직이자 인재양성기관이었기에 미실은 실질적으로 왕권을 장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미실은 후궁들을 모두 다스리고 있던 터라, 왕 주변의 여자들은 미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심지어 진평왕의 모후 만호 부인이나 왕비 마야 부인도 그녀의 영향력 아래 있어야 할 정도였다.


이렇듯 40년 동안 신라 조정을 손 안에 쥐고 흔들었던 미실은 607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몇 달 동안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그녀였지만 세월 앞에선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60줄의 나이에 접어든 그녀에게 여전히 순애보를 간직한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설원랑이다. 설원랑은 10대의 어린 나이에 미실을 만나 섬겼고 그후로 그녀의 수족이 되어 입 안의 혀처럼 움직였다. 그는 그녀가 풍월주가 되라고 하면 풍월주가 되었고 풍월주의 자리를 내놓고 문노를 스승을 섬기라고 하면 거기에도 순종했다. 미실이 죽을 병에 걸려 드러눕자, 그녀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낮없이 병석을 지켰다. 그러다 그는 오히려 그녀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했다. 40년동안의 순애보는 그렇게 끝났다.


설원랑이 죽자, 미실은 아픈 몸을 일으켜 슬퍼하며 울었다. 그리고 자기의 속옷을 설원랑의 관에 함께 넣어 장사지내도록 했다. 마침내 미실도 그의 사랑을 받아들여 구천에서나마 부부애를 맺자는 언약을 한 것이다.

사다함을 보낸 이후 한번도 열리지 않았던 그녀의 순정이 마침내 40년 동안 지극 정성으로 자신을 보필한 설원랑에 의해 열린 것이다. 그 며칠 뒤 그녀도 설원랑을 따라 구천으로 갔다. 동생 미생의 친구 설원랑이 죽을 당시에 58살이었으니 그녀는 예순 살쯤 되었으리라.



******************************************<출처: 한권으로 읽는 신라실록>

 

 

화랑세기



1989년 필사본 공개…진위논쟁 계속

'神國의 道’로 근친혼도 정당화


미실 얘기의 바탕이 된 ‘화랑세기 ’는 현재까지 필사본만 공개됐는데, 학계에선 아직 진위논쟁을 벌이고 있다.

‘화랑세기 ’는 신라의 김대문(金大問)이 신문왕 1년(681)에서 7년 사이에 저술한 책으로 ‘삼국사기 ’보다 무려 460여년이나 앞선다.현재 공개된 필사본은 일본 궁내성 도서과 촉탁을 지낸 박창화가 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9년 필사본이 처음 공개됐을 때 위작 논쟁이 벌어진 이유 중의 하나는 근친상간도 서슴지 않는 난잡한(?) 남녀관계였다. 그러나 ‘화랑세기 ’는 이런 근친혼을 ‘신국(神國)의 도(道)’라는 고유한 개념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22세 풍월주 양도는 이복누이와의 결혼을 권유하는 어머니 양명공주에게 “중국 풍습이 아니라 신라의 풍습을 따르겠다 ”며 수락하는데 이에 대해 양명공주는 “참으로 나의 아들이다.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어찌 중국의 도로써 하겠느냐 ”라고 칭찬한다.

진흥왕은 미실의 군주(君主·일종의 후궁)임명을 기념해 큰 잔치를 베풀고, 이를 기념해 연호를 대창(大昌)이라고 고쳤다. 당시 신라인들은 중국에서 전래된 유학이 아니라 신라 고유의 ‘신국의 도 ’를 신봉했던 것이다. 현대인들은 ‘신국의 도 ’라는 프리즘을 통해야 미실과 신라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불이문(不二門)

불국사 자하문

건봉사 불이문

통도사 불이문

화엄사 불이문


  천왕문을 지나 수미산 정상에 오르면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도利天)이 있고
그 위에 불이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이 있다.

  이 불이문이 곧 해탈문(解脫門)이다.
진리로서 모든 번뇌를 벗어버리면
해탈을 이루어 부처가 된다고 하여 해탈문이라고 한다.

  제석천왕의 세계인 도리천위에 세워져 있는 이유는 33천보다 더 높은 경지에 불이문이 세워져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도리천 위로 전개되는 26개의 하늘나라를 넘어서는 곳에 부처의 경지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 불이문이 세워질 곳은 더 높은 곳이어야 하지만, 땅을 디딜 수 있는 마지막 정상이 33천이기 때문에 그 위에다 불이문을 세운 것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다.

왜 불이문의 위치를 수미산 정상이라 하는가?

  1.   불이문에 이르려면 천왕문을 통과해야 한다. 천왕문을 통과하면 수미산 정상에 이르고 그 정상에 33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미산 기슭에 일주문으로 사바세계와 불국정토를 구분하고,
    그 중턱에 천왕문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정상에 불이문을 세워 지상과 허공세계, 번뇌와 깨달음의 세계를 구별지운 것이다.
  2.   불국사 불이문(현판명은 자하문 紫霞門)에 도달하려면 청운교, 백운교의 33계단을 올라야 한다. 33천인 도리천에 올라야 불이문에 이를 수 있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자하문!
    자주빛 안개이 서려있는 문.
    자주빛은 자금색(紫今色)의 준말이며
    부처님의 몸 색갈이 자금색이다.
    즉 부처님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자금색 서기가 안개처럼 구도자의 몸을 감싸고 있음을 상징화한 것이며, 불이문이 부처님의 서기를 느끼고 부처의 경지를 어렴푸시나마 감지할 수 있는 자리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자금색 서기로 가리워진 불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부처님을 모신 전각, 불국정토가 나타난다.
    그 곳은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자리, 분(分)에 따라 차례로 깨달아 가기만 하면 불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고 하여 대승기신론에서는 시각(始覺)의 네 단계중 수분각(隨分覺)이라 한다.
불이(不二)
그것은 둘이 아닌 경지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생사가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세간과 출세간, 선과 불선(악이라 표현하지 않음),색과 공 등
이 둘이 아닌 경지를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불이가 하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같음(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 것은 불이이기 때문에 하나일 수도,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서로의 개별성은 분명히 구별되어 있는 평등자유 그 자체다.

그러나 그것 또한 맞지 않다.
진정한 불이는, 참된 해탈의 경지는 언어를 넘어선 곳에 있다.


시험을 볼때면 책가방을 사이에 두고

    시험을 보았습니다




              이때는 눈이 수도없이 많이도 내렸습니다




        나잡아 봐라 메~롱 지금 그때에 친구들이 그리워집니다



    뻥튀기 간식도 없는집 아이에게는 그림에 떡이였습니다



                              말뚝박기 가위 바위 보

 


                    콩자반에 멸치볶음은 반찬중에 으뜸


               시간이 있으때는 항상 동생을 돌봐주는건

                    일상의 기본 이였던 시절



여학생들만 지나가면 괜스레.

폼나게 걷던 남학생들


많은 짐을 실어날으는 마부가 있던 그때 그시절

짐수래가 힘들게 고개를 넘으려면 먼저랄것도 없이

손수래를 밀어주는것 또한 기본적인 친절이였습니다

 


 이상하리 만큼 시험 기간만 되면

왜이리도 잠이 많았던지




참고서및 수련장 산다고 속이고 돈들고

만화가게로 직행하던 그때 그시절



학교와 선생님 몰래보던 영화가 더욱 더


재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려운 그때 시절이였지만 어머니들은

장남이라고 때로는 장조림도 싸주셨다




신문지나 빈병을 가져가면 번데기 아저씨는

빙 돌아가는 뽑기 판을 한번 찍게 해주셨다

 


인성 교육이 위분 잘모시는 예의가

습관화 되어있는 착한 학생들이 많던 그시절


 




교실 마룻바닥에 염색을하고 양초와 색필가루로

마루바닥을 광내고 미끄럼 타기도 했던시절




왼쪽으로 (좌측)으로 통행하면 공산당이라고


생각했던 시절



말썽 꾸러기 어린들은 가끔씩 친구와 싸우기도 하였다


 



화장실이 부족하던 그시절 거리엔 온통 지뢰밭 천지였다

 



용돈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그시절


      당신께 행복을 팝니다 마음을 아름답게 열면 하얀빛이 비춰요. 눈이 부셔 뜰 수가 없는 그 빛은 눈을 감아도 보입니다. 가슴을 아름답게 열면 사랑 빛이 비춰요. 마음이 부셔 기쁠 수 밖에 없는 그 빛은 어디서든 빛납니다. 눈을 아름답게 열면 빛이 보입니다. 사랑이 보입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열고 눈을 열고 가슴을 열었습니다. 어디서든 행복할 수 있게 당신에게 행복을 내가 팔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좋은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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