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광릉 전경. 동원이강릉으로 정희왕후와 한 능역에 두 능으로 나뉘어 있으며 500년 세월이 넘도록 왕위찬탈의
역사적 짐을 못 내려놓고 있다.

  조선왕릉 중 가장 아름다운 광릉 숲. 조영 당시부터 뛰어난 경관으로 참배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않던 짓’을 하고 착해진다고 했다. 사후의 세계가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세상을 겁 없이 산 사람도 병들어 신음하다

보면 꿈자리가 사납고 헛것이 보이며 마음이 뒤숭숭해지기 마련이다. 과연 극락과 연옥, 천당과 지옥은 존재하는 것일까. 양심(兩心·두 가지 마음)과

양심(良心·바른 마음)의 사이에서 어떤 마음을 존중하며 살아왔는가.

 난세의 영웅 세조도 말년 들어 부쩍 겁이 많아졌다. 막상 권력의 정상인 임금 자리에 올라 보니 별것도 아닌데 왜 그리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괴롭기만 했다. 돌이켜 보면 어린 조카(단종)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면서 아버지(세종)와 형님(문종)이 아끼던 신하들의 목숨을 너무 많이 끊었다.

○ 무자비한 도륙 원각사 지어 참회

 저승에 가 호랑이보다 더 무섭고 독수리보다 더 용맹스러웠다는 증조할아버지(태조고 황제)를 어떻게 우러를 것이며, 불 같은 성품의 할아버지(태종)

앞에 어찌 조아리고 나서겠는가. 세조는 절을 지어 참회하기로 했다. 옛 고려 때 절인 흥복사 터에 어명으로 새 절을 창건케 한 뒤 원각사라 이름하고

탑과 비를 세웠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안에 있는 오늘날의 원각사지(址)로 10층 석탑은 국보 2호로, 비(碑)는 보물 3호로 각각 지정돼 있다.

 유교를 치도(治道) 이념으로 내세워 건국한 당시의 조선 국왕이 성안에 절을 짓는다는 건 혁명적 발상이었다. 집현전과 유생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그래도 세조는 강행했다. 그 후 세조의 증손자가 되는 망주(亡主) 연산군이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방으로 만들어 기생들을 농락하고, 역시 증손자

중종 때에는 절마저 헐어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다.

 성군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둘째 왕자로 태어난 세조(1417~1468)는 저승에서까지 원망을 듣는 임금이다. 조카 왕위찬탈, 잔혹한 사육신

 도륙, 무력 강압 통치의 일인자라는 수식어가 훙서한 지 540여 년이 지나도록 붙어 다닌다. 세조가 다시 태어나 그 같은 입장에 또다시 서게 된다면

이 같은 역사적 원망과 저주를 각오하고라도 다시 왕위에 오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문종과 단종시대의 정치적 격변기를 자세히 탐구해 온 사학자들은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1453)에 대해 정당성을 주장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병약한 문종이 승하하며 의정부의 핵심인 김종서·황보인 등에게 유언으로 단종을 부탁했는데 이들의 권력 독점이 지나쳤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집현전 학자

정인지·최항·신숙주 등과 후일 사육신이 돼 죽는 성삼문·하위지까지 정난에 중립을 지켰거나 세조에게 동조할 정도였다.

이후의 역사는 세조의 편으로 기울었다. 세조의 쿠데타 과정에서 뜻을 달리한 수많은 인재가 혹독한 고문 끝에 죽었거나 귀양 가고 벼슬에서 떨어졌다.

친동생 둘(안평·금성대군)과 계모 혜빈 양씨(세종 후궁)와 그의 아들인 이복동생(한남군·영풍군)도 목숨을 잃었다. 이 모든 것이 병들어 쇠약해져 가는

세조에게는 큰 고통이었고 후회스러운 일들이었다.

○ 피부병 완치 부처 은혜 감동 대장경 인쇄

 어느 해 여름 세조는 강원도 평창 상원사 문수보살이 용하다 하여 그곳을 찾았다. 땀에 찬 미복(微服·임금이 몰래 민정을 살피러 다닐 때 입는 옷)을

벗어 놓고 절 입구 우물에서 등목하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어린 동자 하나가 나타나 등을 밀어주었다. 손길이 어찌나 곱고 시원한지 기특하여

동자에게 일렀다.

 “동자야, 너는 어디 가서 임금의 등을 보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어린 동자가 등과 목을 골고루 문지르며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절대로 문수 동자를 친견했다고 발설해서는 아니되십니다.”

 세조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세조의 피부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형수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저주하며 침을 뱉은

이후 피가 나도록 긁어도 낫지 않는 고질 피부병이었다. 세조의 피부병을 낫게 한 그 우물은 지금도 상원사 입구에 있다. 대장경을 인쇄하고 간경도감을

설치해 금강경언해를 간행한 그의 치적도 불은(佛恩)에 감동한 마음의 시주였다.

 세조는 그가 사는 52년 동안 한 인간으로 겪을 수 있는 영광과 불행은 빠짐없이 경험했다.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나 정권의 실세들에게 따돌림당하는

좌절도 맛보았고 임금이 돼 천하 권력을 쥐고 흔들었다. 세자로 책봉한 아들(의경세자)이 죽었을 때 하늘을 우러러 원망했고

둘째 며느리(예종왕비·한명회의 딸)와 손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땅을 치기도 했다. 까닭을 알 수 없이 겹치는 가족사의 불행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마다

그의 철권정치는 조정을 더욱 숨 막히게 했다.

○ 재위 14년간 경국대전 편찬 등 큰 치적

 세조는 14년의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치적을 남겼다. 군제개혁을 통한 국방력 강화, 호패법의 재실시, 백성을 위한 토지개혁제인 직전제 실시, 경국대전 편찬

등의 업적이 대의명분을 잃은 왕위찬탈에 묻혀 버리고 만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라지만 세조와 안평이 단종시대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면

원로 대신들과 집현전 젊은 학자들 간 치열한 권력 다툼이 어찌 됐을지 사학자들의 염려는 크다.

 세조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마음을 놓지 못해 능 관리를 철저히 당부했다. 능호를 광릉(光陵)이라 올리고 조선왕조 내내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47번지에 있는 광릉은 사적 제197호로 지정돼 있으며 현재까지도 풀 한 포기, 돌 하나의 채취가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

 광릉은 세조왕비 정희(貞熹)왕후와 같은 능선 아래의 다른 언덕에 안장된 동원 이강(同原異岡) 능제이다. 두 능의 중간지점에 정자각을 세운

조선 최초의 능으로 세조의 유언에 따라 현실(玄室·임금 시신을 안치하는 석실)을 꾸미지 않고 회격으로 대신했다. 봉분 곁의 병풍석도 쓰지 않고

난간석만 두른 조선 능제의 일대 변혁을 광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촬영을 허가받아 능상에 오르니 세조 능은 자좌오향의 정남향이고 정희왕후 능은 축좌미향의 서남향이다. 동일 영역 내에 있으면서도 내룡맥에

따라 이처럼 좌향이 달라지는 게 풍수적 물형이다. 천신만고 끝에 차지한 왕권의 번창을 위해 당대 최고의 국풍(國風·왕릉 터를 잡는 풍수)이 터를 골랐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능 뒤 입수(入首) 용맥은 결인(結咽·병목 현상을 이뤄 기를 모았다가 밀어주는 산세)을 잘 이뤘고 좌(동)청룡, 우(서)백호, 북현무, 남주작의 사신사가

겹겹인 데다 안산과 조산이 첩첩이다. 여기에다 입수(入水)와 파수(破水)의 물길 하나 소홀함 없이 사격(砂格)을 두루 갖췄다. 정희왕후 능 무인석

아래에는 큼직한 옥새석이 자리하고 있다. 능 앞의 옥새석은 최고의 길격(吉格)으로 왕권을 상징한다. 이후 조선왕실의 대통은

세조와 정희왕후 혈손으로 이어졌다.

<국방일보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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