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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임금 단종이 영면해 있는 영월 장릉. 서울 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조선 왕릉으로 참배객들의 가슴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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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정령송. 경기 남양주시 사릉(정순왕후릉)에서 옮겨 심은 소나무다. |
왕릉에 가면 제향을 모시는 정자각에 이르기 전 박석을 깔아 놓은 참도(參道)라는 길이 있다. 좁다란 길이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세 갈래로 구분돼 있다. 중앙이 가장 높고 왼쪽이 약간 높으며 오른쪽은 가장 낮다. 중앙은 신도(神道)라 하여 산릉제향 시 오직
대축관(大祝官)만 밟을 수 있고 왼쪽은 임금이 걷는 왕도(王道)이며 오른쪽은 한 발짝 물러서서 세자가 따라 걷는 길이다.
수년 전 필자는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 전수자로 단종대왕 능침인 영월 장릉 제향에서 대축관으로 봉무한 적이 있다.
단종의 존호(尊號·임금이 승하한 뒤 치적을 높이 새겨 조정에서 지어 바친 글)가 적힌 축문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여러 헌관과 제관들에
앞서 신도를 걷는데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국의 제왕이 어찌하여 참담한 생애를 살다가 비명횡사로 죽어 가야 했나 하는 안타까움에서였다.
축문을 읽는 걸 독축(讀祝)이라 하는데 그날의 독축은 매우 구슬퍼 일반 참배객까지 애처로운 마음에 한숨을 몰아쉬었다.
가정에서도 독축을 할 때 ‘너무 높지 않고 낮지도 않게’ ‘가성이나 괴성을 삼가고’ ‘왜 일찍 돌아가셨느냐고 원망하고 그리워하는
목소리로 읽어’ 가면 부복한 일가 친척들의 억장이 녹아난다. 단종의 능 제향은 매년 10월 3일이다.
그 후로도 필자는 장릉(莊陵)을 여러 번 찾았다. 필자의 졸저 ‘대한민국 명당’을 집필하면서 벽계풍수학회 조수창 회장과 동행해
풍수적 물형을 샅샅이 살펴보고 온 적이 있다. 사람과 인심은 변해도 산천은 변함이 없는 법이다. 신록이 푸르렀던 그해 여름 사진이
이번 호에 게재됨을 독자 여러분께 양해 얻고자 함이다.
○ 사고무친 단종 후궁 젖 먹고 자라
예로부터 부모는 팔자라 했다. 어떤 부모의 몸을 빌려 태어나느냐에 따라 절반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난다는 말이다.
어느 누군들 돈 많고 권세 누리며 출세한 부모를 만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천륜으로 맺어지는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은
세상 누구에게도 선택권이 없다. 다만 숙명일 따름이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부모 노릇 다 하는 게 아니다. 양육하고 교육하며 성인이 될 때까지 지켜줘야 하는 것이 부모의 의무다.
더구나 단종은 사고무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조모가 되는 혜빈 양씨(세종의 후궁)의 젖을 먹고 자랐고 친 혈육이라곤
나이 어린 누이 경혜공주밖에 없었다. 이런 시국 상황을 둘째 왕자 수양대군과 셋째 왕자 안평대군은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정치권력의 핵심이었던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는 안평을 암묵적으로 지원했다. 천성적으로 호방한 기질에
과단성을 타고난 수양이 이를 좌시할 리 없었다. 한명회·권남 등 권모와 지략에 능한 책사와 홍달손·양정·류수 같은 힘센
무사들이 그의 수하로 규합되었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절박한 판세에서 갑자기 문종이 붕어하자 12세의 어린 단종이 왕위를 계승(1452)한 것이다.
돌봐줄 사람도 없는 요즘의 초등학교 6학년생이 보위에 오른 것이다. 할 수 없이 단종은 부왕이 믿던 대신들을 의지하게 됐고
왕권은 흔들리며 이른바 내각책임제 격인 신권(臣權)통치로 기울었다. 이 판도에서 먼저 치고 나온 게 수양의 계유정난(1453)이다.
이후 조선 국초의 역사는 피바람이 몰아치며 비참해지고 만다. 친동생이자 수양의 정적이었던 안평은 아들과 함께 사사당하고
수백 명에 가까운 인재들이 견딜 수 없는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 임금 자리가 무엇이고 권력이 뭔지도 알 수 없는
단종은 숙부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그저 살려만 달라”고 애원했다. 정권을 새로 잡아 벼슬자리에 오른 정인지·한명회·권남 등이
단종 앞에 나아가 왕위를 내놓으라 하자 얼른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 영월 청령포로 유배 외로움 극에 달해
단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곧바로 상왕이 됐다. 사육신의 복위 계획이 정창손과 김질의 고자질로 발각되자 노산군으로
강봉된 후 머나먼 영월 땅 청령포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돼 버렸다. 부왕의 국상 중임에도 숙부의 강권으로 가례를 올린
정순왕후 여산 송씨와도 떨어져 단종의 외로움은 극에 달했다. 이럴 때 단종은 영월 관풍매죽루에 올라 기막힌 신세를 한 편의
시로 달래곤 했다.
소쩍새 울다 지친 새벽 봉우리엔 조각달만 밝고
피를 흘린 듯 봄 골짜기에는 떨어진 꽃들이 붉은데
귀머거리 하늘은 아직도 이 애달픈 호소 듣지 못하고
어찌하여 근심 많은 이 내 사람의 귀만 홀로 밝단 말인가.
하늘도 천지신명도 어쩔 도리가 없을 때가 있다. 다만 지켜볼 따름이다. 실낱같은 단종의 명을 재촉한 건 경북 순흥 땅에
귀양 가 있던 여섯째 숙부 금성대군이 이보흠과 계획한 또 다른 복위 운동의 발각이다. 세조는 아예 후환을 없애겠다며
의금부도사 왕방연에게 사약을 지어 내려 보냈다. 이리하여 단종은 한 많은 생을 마감하게 되니 보령 17세, 요즘 나이로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왕방연은 단종의 사형을 집행하고 돌아오며 각혈할 것 같은 슬픔에 잠겼다. 어쨌든 자신이 가져간 사약으로 인해 어린 임금이
생목숨을 끊은 것 아닌가. 그는 영월 동강 가에 앉아 피를 토하는 시 한 수를 지어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곳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그 후 왕방연은 서울에 와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 경기도 구리에서 배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마쳤다. 단종이 승하한
10월 24일이면 배를 한 바구니씩 상에 올리고 제사를 올렸다. 어린 임금을 유배지로 호송하며 어명이 무서워 물 한 모금
못 올린 한 때문이다. 유난히 달고 물이 많아 이 지역에서 나는 배를 ‘먹골배’라 부르게 된 연유다.
○ 영월 호장 목숨 걸고 시신 거둬
세조는 단종을 죽여 동강 물에 던져 버리고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해 버리겠다고 했다. 이토록 서슬 퍼런 시국에도
의인 하나가 있었으니 영월 호장(戶長·지방의 높은 벼슬) 엄흥도다.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면서
물 위에 떠 있는 시신을 수습해 영월 동을지산에 암장해 놓았다. 그리고 눈 덮인 겨울날 노루가 앉아 있던 자리만 녹아 있어
그 자리를 파고 묻었다. 신좌(서에서 북으로 15도) 을향(동에서 남으로 15도)으로 풍수학인들은 이 자리가 조선의 왕릉 가운데
건원릉(태조고황제), 영릉(세종대왕)과 더불어 3대 명당으로 꼽고 있다.
세월이 흘러 240여 년이 지난 숙종 24년(1698) 비로소 단종은 복위되면서 시호를 받고 영녕전에 부묘되었다. 중종이나 효종 때도
몇몇 신하가 복위 상소를 올렸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모두가 세조의 후손이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숙종 때 대제학 서종태가 장릉을 복원하며 정자각 상량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구불거리는 산세는 멀리 그 줄기가 갈라졌고
봉황이 날며 용이 오르는 기상을 머금었다. 뭇산이 둘러쳐 옹위함이 임금께 절하는 듯하다.”
한때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사릉(정순왕후릉)과 합장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600년 역사의 왕릉을 후세인들 판단으로 옮긴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사학계가 발끈했다. 현재 장릉 앞에는 사릉에서 옮겨 심은 소나무 정령송(精靈松)이 쓸쓸히 서 있다.
<국방일보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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