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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요지에 자리한 성종대왕의 선릉. 세조 이후 금지됐던 병풍석을 둘러쳐 절정기에 달했던 왕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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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 정자각을 오르는 계단. 능 제향 시 왼쪽 계단은 임금이나 대축관만 올랐던 신로이고 |
사람에게 운(運)이라는 게 있을까.
생각지도 않던 일이 기대 이상으로 잘 풀리고 하는 일마다 척척 맞아떨어질 때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조선 제9대 임금 성종대왕(1457~1494)은
운이 좋은 군주였다. 어떤 왕손은 마땅히 오를 임금 자리에 등극했다가도 목숨을 잃고 또 다른 왕손은 똑똑하고 잘났다는 이유로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아 죽는 판국에 어른들의 계략과 흥정에 의해 만 백성의 어버이가 된 이도 있다.
옛날 임금의 이름은 백성들이 알지 못하는 어려운 벽자(僻字)로만 골라 썼다. 임금의 이름으로 쓴 한자를 백성들이 잘못 알고 함부로 썼다간
왕실을 능멸했다고 해 문초를 당하기도 했다.
○ 궁궐로 입궐 자을산군으로 책봉
성종은 1457년(세조 2년)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1438~1457)와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두 달도 안 돼 덕종이 죽자
할아버지 세조가 불쌍히 여겨 궁중에 입궐시켜 키우면서 자을산군으로 봉했다. 성장하면서 세 살 위의 형 월산대군은 소양공 박중선(순헌 박씨)의
딸에게 장가가고 자을산군은 당시 영의정 한명회의 넷째 딸(후일 공혜왕후)과 가례를 올리게 됐다.
자을산군이 11세에 장가를 들고 보니 장인의 셋째 딸이 숙부 해양대군(예종)의 부인이어서 작은 아버지이면서 동서지간이 되고 작은 어머니이면서
처형이 되는 이상한 촌수가 됐다. 12세 때 숙부가 임금이 됐는데 건강이 안 좋아 모두 걱정이었다. 13세 되던 해(1469년) 겨울 갑자기 20세의
나이로 예종이 승하(11월 28일)하자 할머니가 왕위에 앉혀 당일로 제왕이 됐다. 생각지도 않았던 주상(主上)의 자리였다.
예종의 아들이면서 사촌지간인 제안대군은 당시 3세여서 왕이 되기가 어려웠지만 3세 위의 건강한 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임금이 된 까닭이
장가를 잘 간 덕분이란 건 나중에서야 알았다. 20세가 될 때까지 할머니(정희왕후)가 시키는 대로 하면 걱정할 게 없었다. 정희왕후는 한명회·
신숙주 등 원상(院相)들과 국정 전반을 논의해 얻은 결론을 어린 왕에게 지시했는데 성종은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그때 할머니는
52세였고 어머니 인수대비 나이는 33세였다.
대궐의 법도는 지엄하다. 비록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더라도 보령(寶齡) 20세가 넘으면 모든 권력은 주상에게로 넘어간다. 임금은 지존(至尊)이다.
할아버지·할머니는 물론 사가의 부모까지도 신하일 뿐이다. 이는 국모가 된 왕비의 친정부모도 다를 바 없어 곱게 키운 딸을 만나면서도
칭신(稱臣)을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던 것이다.
○ 권력 넘어오자 놀라운 통치력 발휘
성종은 영특한 임금이었다. 하루아침에 권력이 자신에게로 넘어오자 놀라운 통치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7년의 국정 수습기간 동안 봐 온
온갖 폐단을 기억하고 재위 중에 바로잡으며 기강을 새로이 했다. 긴 세월 수렴청정하며 조정의 막후 실력자였던 할머니도, 사사건건 참견하며
제동을 걸던 어머니도 지켜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우선 성종은 왕위에 못 오르고 요절한 아버지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숙부가 등극하면서 회한의 세월을 보낸 어머니에게 인수대비라는
휘호를 올렸다.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회간왕(懷簡王)이란 덕종의 시호도 받아오게 해 어머니의 한을 풀어 주고 원(園)을 능()으로 격상시켰다.
30세도 안 된 왕의 치적에 탄력이 붙은 것도 이때부터다.
성종은 원상 제도를 폐지하고 왕명출납과 서무 결재권을 친히 행사했다. 원상제(院相制)는 세조가 사후 왕권의 흔들림을 염려해 최측근
재상들을 원상으로 임명한 뒤 국정을 논의케 했던 최고 권력기관이었다. 한명회·신숙주 등으로 구성된 원상들의 지나친 간섭이 성종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리고는 이들의 견제 세력으로 김종직을 수장으로 하는 신진 사림(士林) 세력을 중용해 왕도정치를 실현해 나갔다.
또한 고려 충신 정몽주와 길재의 후손을 파격적으로 등용해 조정을 놀라게 했다.
성 밖 선농단(先農壇)에 가 풍년을 비는 제사를 친히 올리고 왕비에게는 손수 누에를 치도록 했다. 선농단 제사 후 소를 잡아 푹 곤 국물에
밥을 말아 파를 섞어 소금 간으로 함께 먹으니 백성들은 감복했다. 오늘날 서민 음식으로 즐겨 먹는 설렁탕의 유래가 여기서 비롯된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개국한 조선왕조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 유습이 남아 일부 친·인척 간의 혼인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
성종은 외가 6촌 이내 결혼을 법으로 금지시켰고 재혼한 여자의 자손에 대해 관직 등용을 금지했다. 숙질과 당형제 간에 다투거나 송사하면
변방으로 내쫓기까지 해 윤리 강상을 엄하게 세웠다.
○ 한달에 두 번씩 군대 사열·국방 점검
한 달에 두 번씩 군대를 사열해 국방태세를 점검하고 형벌이 남용되지 않도록 탐관오리들을 다스렸다. 특히 문치(文治)에도 주력해 개국 이후
100여 년에 걸쳐 반포된 법전·교지·조례·관례 등을 총망라시킨 경국대전을 완성했다. 이후 경국대전은 왕조 통치 이념의 근간이 됐다.
이 밖에도 삼국사절요·동국여지승람·동문선 등을 편찬해 문물의 전성기를 이뤘다.
바야흐로 세종대왕 이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태평성대였다. 태조→태종 시대의 역성혁명→무단정치가 세종의 출현으로 막을 내리면서
흉흉했던 민심은 고려를 잊고 조선 백성으로 살아가게 했다. 더불어 단종→세조 시대로 상징되는 왕위 찬탈의 악명도 성종대에 와 비로소
옛 일이 돼 간다. 백성들은 성종을 어버이처럼 따랐고 살림살이도 풍요로워졌다.
성종은 여자를 좋아했다. 모두 12명의 왕비와 후궁을 거느려 16남 12녀를 뒀다. 한 임금을 섬기는 여자들이 많다 보니 시기와 질투는
말할 것 없고 급기야는 세조 이래 최대 인명 살상극을 부르게 된다. 성종의 치적을 뒤덮고도 남는 조선 최대
‘여인의 난’은 추후에 쓰기로 한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역은 성종 능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부르는 것이다. 선릉(宣陵)에는 성종(임좌병향)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
(간좌곤향)와 함께 아들 중종(건좌손향)의 정릉(靖陵)이 자리하고 있어 선정릉으로 부른다. 서울 강남구 삼성2동 135-4번지 7만2778평의
사적 제199호다. 사방이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노른자 땅에 산소를 공급하며 ‘강남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는 요지 중의 요지다.
성종은 1494년 희대의 폭군인 아들 연산군에게 어쩔 수 없이 왕위를 넘겨 주고 재위 25년 만에 승하하니 보산(寶算) 38세였다.
성종의 바람기로 인한 내명부의 반란은 다음호로 이어진다.
< 국방일보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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