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         시 : 2010년 3월 22(월) 12: 30  - 13:00

2.  장         소 :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지

3.  답   사   기 : 동화사지 부도골 찾아 헤메이다. 주린배를 채우느라 문막읍 건등리에서 중식을 하고

                      다시 안창으로 차량을 돌려 흥법사지를  답사할 진대  갑자기 진눈개비가 내린다.

                      코끼리 다리 훑어 보기식 흥법사지 답사를 하여 본다.

4. 답사 사진자료

 

 

 

 

 

 

 

 

 

 

 

 

 

 

 

 

 

 

 

  

 

 

 

 

 

 

1. 답사 일시 : 2008년 5월 23일(금) 11: 30 - 11:50

2. 장       소 : 원주시 소초면 흥양리 부흥사지 석탑재

3. 누  구  와 : 업무일로 출장 나왔다 들림

4. 후       기

    모처럼 하루를 얻는 기회가 되어 어제에 원주집으로 복귀 하려하니  모든일이

    내 뜻대로 되지는 않는가 싶다.

    지난 4월 정례신체검사 결과가 오늘 나오는데 아침 09시까지 대관령 상급기관

    까지 와서 전문의 상담을 하란다.

    전문의 상담이란 뻔할뻔 놀랄 놀 자 이지만 그래도 종합검진때 혈액정밀종합검사

    를 의뢰하였으니 그비용을 결재하고 검진서를 받아야 한다. 이왕이면 대관령으로

    가는 길인데 지난 겨울에 드라이브하였던 그 코스를 따라 비행기재 - 광하리 -

    정선읍내를 거쳐 북평 나전리에서 숙암리로 하여 59번 국도를 타고 진부로 돌아

    다녀오기로 마음먹고 나섰다.

    왜냐하면 몇번이고 벼르고  하였지만 진부면 수항리 수항리 폐사지를 답사 하리라

    별렀지만 이번에는 그곳을 둘러보고 대관령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아침 일찍 나왔지만

    생각보다  구불거리는 강원도 계곡의 산길은 예상보다 어떤 지체시간이 많아 오늘도

    수항리를 통과 하면서도 들리지 못하고 꿩대신 닭이라고 검진서 받고 원주로 돌아오는

    길에  아여 소초면 사무소에 들려 부흥사폐사지 위치를 확인하고  잠시 찾아 보았다.

5. 답사자료

 

 

 

 

 

 

 

 

 

 

 

옛 통일신라시대의 북원경 신라 9주 5소경중의 하나가 바로 북원경(원주)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원주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 까지 크고 작은 사찰이 분포되어 있는 듯하다. 그중 대표적 사찰이

지정면 안창리에 있는 흥법사지 와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지와  정산리의 

거돈사지 등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그외 알려지지 않은 작은 암자에 해당하는 통일신라시대의 폐사지등이 두루분포되어

태장동의 영전사지 등 사찰들이 있었고 여기의 문화재급 석탑과 부도탑 그리고

불상들이 일제 강점기때 남한강 수운 교통의 발달로 반출되는 수모를 겪은바 있다.

 

이러한 보물급 문화재의 영전사지 보제존자사리탑, 원주철불,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

흥법사지 진공국사 부도탑 및 석관, 거돈사지 원공국사 승묘탑, 그리고 傳 흥법사지

염거화상 부도탑등 이루 말할수 없이 싹쓸이 원주지역 문화재가 수탈당할 때

아직도 숲속에서 천년동안 잠자고 있는 석탑재가 있는 곳을  확인해 달라는 메일을 받고

오늘은 그곳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이곳은 이미 4-5년전에 답사되어졌던 곳으로

흥업면 대안1리 승안동 마을 골짜기에 석탑중에도 희귀한 팔부중상의 3층석탑재가

숲속에 잠자고 있단다.

 

메일로 연락주신 분은 카페를 통해 교감을 나누어 온 동국대학교 김환대 박사로 메일을 보내와

그곳을 답사하기로 하고 가족과 함께  나들이 복장에 등산화를 착용하고 김 박사가 알려온

대로 대안1리 승안동 부락 무명암자( 지역 촌노들은 본인에게 약사암이라고 일러줌)터를

찾아 나섰다. 흥업자동차 학원을 지나 대안1리 시내버스 정류장 느티나무 아래 승안동

부락입구 표지석 좌측으로 교량을 건너 1.5킬로 미터 직진하여 올라가니 천수답을 잘

정리하여 대형 자연석으로 대지를 조성하고 그 끝나는 지점은 펜션형 주택 2동이 있는 곳에

차량을 주차하고 좌측길로 150미터 정도 이동하니 공터가 나오고 여기에서 다시 오른쪽

골짜기를 건너 로프가 매어져 있는 산행로를 따라 오르니 옛날 집터인지 천수답이었던지

수평으로 계단화된 지역이 나오고 여기에서 모퉁이를 돌아 계곡물이 졸졸졸 흐르는 계곡을

따라 100여 미터 오르니 이끼낀 바위슬랩으로 물이흐는 지역에서 수미터 떨어진 곳에

숲속에 산초가시나무 숲속에 옛 페사지가 나타나니 여기가 바로 약사암터인 듯하다.

 

폐사지 축대를 우로 돌아 오르는 땅속에 박힌 석탑재가 여기저기 흩어져 보인다.

가장 먼저 들어 오늘 것이 석탑 상층기단 면석으로 보이는 석탑재가 반쯤은 땅속에

뭍혀 있는데 양우주와 탱주가 선명하고, 탱주 좌우로 팔부중상 2개가 뚜렷이 윤곽을

나타내고 바로 옆에도 반쯤은 땅에 뭍힌채로 상층기단 면석의 우측 우주와 가운데 탱주

가 선명히 보이는 상층기단 면석에 또다시 2개의 팔부중상이 보인다. 여기에서 1미터쯤

떨어진 곳에 다시 상층기단 면석이 보이는데 이면석은 양우주는 보이지 않고 버팀기둥인

탱주만 선명히 보이고 좌우로 팔부중상이 선명한데 좌측 팔부중산은 육안으로 보아도

합장한 듯한 모습이 아수라상으로 보여진다.

 

잠시 3개의 상층기단 면석이 흩어진 윗쪽에는 상층기단갑석으로 보이는 석탑재가

비스듬이 누워 있고 , 그위로는 지대석으로 보이는 길다란 다듬어지지 않은 석탑재가

보인다 , ㅎㅎㅎㅎㅎ

모처럼 폐사지 답사에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긴 처음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 앉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 폐사지를 둘러보니 좌우 명봉산 자락 능선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고

골짜기 양지바른 곳에 이 폐사지는 정동을 향하고 있고 멀리 치악산 비로봉이 시원히 보인다.

폐사지 절터 뒤쪽으로는 여러 단애의 화강암이 울타리처럼 둘러쳐져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부라리고 보아도 마애불은 뵈이지 않는다. ㅋㅋㅋ

 

다시 상층기단 면석 3개에 팔부중상 6개가 식별되는 폐사지 축대 바로 아래로 내려 서니

이끼낀 석탑재가 보이는데 어림짐작으로 1층석탑의 옥개석과 2층에 해당되는 옥개석이

풀숲에 가리워지고 담쟁이 넝쿨속에 이끼를 머금은채 보인다. 싸리나무를 꺽어 깨끗하게

쓸어 내리고 디카를 들이 대 본다. 옥개석(지붕돌) 주변 나무를 제치고 아랫부분 옥개 받침을

보니 희미하지만 4단 옥개 받침과 두툼한 낙수면과 우동 그리고 마지막 옥개받침 위 우동의

낙수면은 세월속에 아니면 석탑이 무너질때 그러했는지 아니면 풍화작용에 의한 것인지

훼손이 다소 심하지만 옥개받침은 비교적 선명하다.

 

그리고 축대 바로 아래 옥개석이 있는 곳 바로 옆에는 전에 답사한 분들이 주워서 올려

놓았는지 깨어지 청자 조각도 보인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 우물터로 짐작되는 곳도

숲속에 파뭍혀 보인다. 설레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러면 석탑을 이루는 탑신(몸돌)은

그 주변에 보이는 지 아무리 숲속을 헤집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이쯤으로 무명 약사암 석탑재 답사를 마치면서 설레이는 마음을 가라 않힐수가 없다.

원주지역에서 아직까지 팔부중상으로 만들어진 석탑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적이 없기에

더울 가슴이 두근 거린다.  몇해전에 횡성 중금리 3층석탑의 동탑과 서탑을 답사하면서

팔부중싱은 보았으나  거돈사지 3층석탑, 흥법사지 삼층석탑에도 없는 팔부중상의

석탑재가 있다는 마음에 더울 가슴 설레이는 것이다.

 

언젠가 문화재청 당국이나 원주지역 문화재연구 답사팀들이 발굴작업 할때 함께 하였음 하는

마음만 생긴다. 어쩌면 온전한 석탑재를 발굴 할 수있을 것 같은 생각에 더욱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 여기가 내가 애타게 찾던 염거화상 부도탑을 옮겨간 곳은 아닐까? 하는

추정속에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 설레인다.)

 

* 참고 자료

   오늘 답사를 위해 GPS 수신기를 휴대하고 위치확인을 하였으나 위성수신이 잘 되지 못해

    위치가 긴가 민가 하면서 수신된 위치를 적요한다.

* 傳  약사암 ( 대안리 승안부락)폐사지 위치

   * 위도 : 북위 37도 18분 16.9초

   * 경도 : 동경 127도 52분 14.4초

   * WGS 좌표

      52S  CG 99916  ,  29270

   * 표고 : 295 m

* 관련 사진자료

< 대안1리 승안동 부락입구 : 왼쪽으로 1. 5킬로미터 시멘트 포장길따라 이동>

 <녹색농촌 체험관 입구 : 좌측 시멘트 포장길로 1. 2 킬로미터 이동>

 <펜션 선돌 왼쪽으로 경운기 길로 150미터 이동 >

 <공터에서 오른쪽 계곡으로 소로길 따라 가면 개울건너 로프매어진 곳으로 오르면 옛 집터나옴>

* 이곳은 옛 조선말 천주교 박해가 심할때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숨어 들어와 부락을 이루고

  농사를 지었었다고 전해짐, 승안부락에는 아직도 100년 된 천주교 공소가 있다고 함>

 <폐사지에서 바라본 치악산 비로봉 : 정동 방향으로 치악산 바라보이며 좌우가 아늑한 양지 능선 사이

   에 폐사지가 위치함>

 < 석탑재의 상층기단면석 1 : 양우주와 가운데 버팀기둥인 탱주가 보이고 좌우에 팔부중상이 희미하게

     보이네요>

 <상층기단면석 2 : 좌측에는 우주가 가운데에는 버팀기둥인 탱주가 좌우측에는 팔부중상이 비교적 선명

   하게 보이네요 (대충 싸리나무로 쓸어내고 찍었는데 선명하지요?)>

 <상층기단면석 3 : 좌우 모서리기둥 우주는 안보이고 가운데 버팀기둥 탱주만 보이고 좌우에

  팔부중상이 선명하게  보이네요 (좌측은 팔부중상중 아수라상 같아 보이는 군요 *^^* ) >

 < 가장자리  부분이 깨어 졌으나 상층기단갑석으로 보이는 석탑재입니다. >

 <지대석으로 보이는  화강암입니다. >

 < 상층기단갑괴임석으로 보이는 잘 다듬어진 석탑재입니다. (상층기단괴임석으로 보여지는 이런

   석탑재 몇개가 더  있을 것 같아요 >

 < 1층 옥개석(지붕돌)으로 보이는 석탑재입니다. 주변 나무들을 발로 헤집고 아래 옥개받침을 바라보니

     4단이 비교적 선명하고  2층괴임도 선명하게 보이며 우동의 낙수면 끝부분이 풍화작용에 의한

    것인지 넘어지며 깨어진 것인지  훼손이 심한 것 같아요>

 < 2층 옥개석(지붕돌)으로 보이는 석탑재입니다. 이끼가 심하고 담쟁이 넝쿨로 덮여있어 제거하고 한

    컷 했습니다. 아랫부문 옥개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고 우동과 낙수면 끝의 훼손이 심하고 반전은

    그리 심하지 않은 것 같군요? >

 <최초 석탑이 세워져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지대석으로 보이는 화강암이 보이고 상층기단갑석이

   비스듬이 누워져 있군요  그 아래에 상층기단 면석 3개가 위치해 있어요>

 

 

 <축대 아래부분 축대높이는 대락 2미터정도 되어 보이구여 축대아래 검게 보이는 곳이 우물터로 보이는

   곳이구여 바로 왼쪽편으로 1층및 2층 옥개석이 떨어져 있습니다. >

 

 <주변에 누군가 청자파편을 올려 놓았군요 (축대 아래입니다.) 아마도 축대위에는 3층석탑이 그리고

  50센티 축대위로는 불전이 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

 

*  이상으로 지가 폐사지에서 본 석탑재입니다. *^^*

 

*  기타 자료

 

 

 < 답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취나물이 어찌나 많은지 한봉지 뜯고 나오는데 춘천에서 오신듯한 30대로

    보이는 분 만나 상세하게 폐사지 알려주고 나오며 펜션앞에서 한컷 했습니다. 도리입니다. ㅎ~~

 

 

 

< 사방불 신앙>

 

 동서남북의 사방에 부처를 모시고 신봉한 신라인의 불국토신앙의 유형 가운데 하나,

문헌에 나타난 사방불에 관한 최고의 언급은 《삼국유사》의 사불산(四佛山)에 관한 기록이다. 이에 의하면 죽령(竹嶺) 동쪽 약 100리쯤 되는 곳에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587년

(진평왕9) 별안간 사면이 방장만 하고 사방에여래가 새겨진 대석이 하늘로부터 산꼭대기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 사방불은 홍사로 보호되어 있었는데, 왕이 이 말을 듣고 그곳에가서

예배드리고, 절을 그 바위 곁에 세운 뒤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문경의 사불산에 이 기록대로 사방불이 실재하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밖에 신라의 유물·유적 가운제 사방불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사방불이 표현된 석탑 또는 석조물로는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사면석불(四面石佛), 경주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방불, 경주경찰서 앞뜰 석탑 2기의 사방불, 경주 동천동 석탑사방불, 안강(安康) 금곡사지(金谷寺址) 사방불만은 《삼국유사》에 언급이 있어서 대강 그 성립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경덕왕이 백률사에 행차하기 위해 산 아래 이르렀을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땅을 파게 하였더니 사면에 사방불이 새겨져 있었으므로, 이에 절을 창건하고 굴불사 라 이름하였다고 전하자. 이 기록에 의한다면 굴불사지의 사방불은 742년(경덕왕 1)에서 764년 사이에 발견된 것을 알 수 있다.


 사방불의 사면에 어떤 부처를 모시는가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많다. 경전을 근거로 하면 대략 여덟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①《금광명경 金光明經》 및 《관불삼매경 觀佛三昧經》에 의하면, 동방 아촉불, 남방 보상불, 서방 무량수불, 북방 천고음불을 모시게 되고 ②《대보적경 大寶積經》에 의하면 동방 집길상왕불, 남방 사자용맹분신불, 서방 마니적왕불, 북방 바라기왕불을 봉안한다. ③《대승대방광불관경 大乘大方廣佛冠經》에 의하면 동방 정수최상길상여래, 남방 무변보적여래, 서방 대광명조 여래, 북방 보개화보요길상여래를, ④《지구다라니경》에 의하면 동방 지구여래, 남방 금광취여래, 서방 실오여래, 북방 뇌음왕여래를 봉안한다.
⑤《공작왕주경 孔雀王呪經》에 근거하면 동방 약사유리광불(藥師琉璃光佛), 남방 정방불(定方佛),서방무량수불(無量壽佛),북방 칠보당불(七寶堂佛)을, ⑥《금강정유가중약출염송경 金剛頂瑜伽中略出念誦經》에 의하면 동방 아촉불, 남방 보생불, 서방아미타불, 북방 불공성취불을, ⑦《대일경 大日經》 데 1권에 의하면 동방 보당불, 남방 대근용불, 서방 무량수불, 북방 부동불을,⑧《대일경》제 5권에 의하면 동방 보당불, 남방 개부화왕불, 서방 무량수불 북방 고음불을 봉안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상에 있어서 반드시 이 유형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던 사례는 허다하다. 일본의대통17년명(大統十七年銘)사면불상(551)에 의하면, 정면에 석가모니불, 배면에 정광, 왼쪽에 미륵, 오른쪽에 보현으로 되어 있어, 사방불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석가삼존형식으로 나타나 있다. 신라의 경우《삼국유사》의 대산오만진신조에 의하면, 태자 보천과 효명이 속세를 버리고 암자를 지어 오대산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5만의 진신을 보았고, 동서남북의 사방에 각각 관음·미타·지장(地藏)·석가를 모셨다고 전한다. 이러한 유형은 신라인들의 독창적인 것으로서, 그들은 신앙대상으로서 이 4불을 도저히 제외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또한 시대가 경과됨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신앙, 특히약사여래신앙이 성행되면서 약사여래의 주처(住處)로 믿어지는 동방에 약사여래를 모시게된 것도 역시 그들이 경전의 유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신라인의 신앙에 따를 독특한 면을 개발하였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현존하는 신라의 사방불들은 모두 이러한 유형에 따라 재구성된 것으로, 동방에 약사여래, 남방에 미륵불, 서쪽에 아미타불, 북방에 석가모니불로 되어 있다. 그리고 중앙에는 보이지 않는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상징적으로 내포한 하나의 불국토를 표현한 것이 신라의 사방불이다.


 또, 불굴사지의 경우 서방에는 미타삼존인 미타·관음·대세지를 조성하였고, 동방에는 약사여래 그리고 북방에는 여래상이, 남방에는 2구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동방과 서방의 경우는 그들의 지물(持物)로 보아 확실히 미타삼존과 약사여래임을 확인할 수 있지만, 남방과 북방의 경우에는 심한 마멸로 인해 거의 모습을 분간할 수 없어 남북의 조각상을 미륵과 석가로 단언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 퍼온 글>

 

 

 

 

 

 

 

 

 

 

 

 

 

 

 

 

구름한점 없는 화창한 가을 날씨이다.

이제 추석명절의 연휴도 오늘로 마지막을

고하는 일요일이다.

추석전날이던가?

SBS의 티비 프로그램 트로트 퀸 장윤정의

이모저모를 다른 특집을 보고

있으려니 가수 장윤정의 집이

강원도 원주란다.

원주라면 도대채 어디일까?

궁금증이 꼬리를 물면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확인하여야만 한다.

해서 네이버여기저기를 검색하여 보아도

알수 없어 우리의 문화재답사를 나서듯

찾아 나서기로 했다.

우선 가족과 함께 남한강이 잘보이는

원주의 한적한 시골마을 부론면 법천리와

정산리 어느 곳이 아닐까 막연한 생각으로

찾아 나섰으나 서울에서 김서방 찾듯

차량으로 주마등처럼 지나치니

알수는 없고 모처럼 나선 곳 가까이에

거돈사지가 위치하고 있으니 우리의 문화재나

함 답사해 보기로 하여 거돈사지로 향해 한 컷

담아 보았다

 

 

 

 

 

 

 

 

 

 

 

 

 

 

 

 

 

 

 

 

 

 

 

 

 

 

 

 

 

입하가 이번주이고 보면 벌써 봄이 지고

여름이 오는가 봅니다.

 

날씨도 예사롭지 않게 햇살이 따갑고 더위를

느낄만큼 금년도 봄도 성큼 성큼 지나가는 듯 합니다.

 

문득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들릴 기회가 있어

주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법천사지를 찾아 보았습니다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아 청색천으로 사지 전체을 뒤덮어

놓은 가운데 에서도 이름 모를 잡초들이 파랗게 새싹을 틔우고

올라오고 있었구여

 

옛 법천사의 영화롭던 시절을 말없이 키켜보는 우마차 도로

한가운데의 천년 느티나무는 나이를 잊은듯 새순을 움티우고

봄을 맞이하고 있군요

<법천사지 내 느티나무>



<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비( 국보 제 59호)>

 


<탑비 안내간판도 내용을 바꿔야 겠군요 현묘탑이 경복궁에서 용산 국립박물관으로 이전 되었겠지요>

 



< 탑비 귀부부분>

 



< 탑비 이수 부분>

 



<귀부 뒷부분>

 



<귀부 등부분>

 

 



<이수 중앙부분( 용문이 선명하네요)>

 



<폐사지내 광배 (석불상은 어디로 가고 광배만 남아 있을까?)>

 



<이름모를 석재 부재들>

 



<법천사지 당간지주 ( 사지 남쪽에 위치)>

 



<당간지주 하단부>

원주에서 서쪽으로 지정면 안창리에 위치한 흥법사지가 있다.
영봉산 아랫자락에 있는 흥법사가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연국사 영준이 932년(고려태조15년)에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이곳에 있었던 진공대사탑비에서 진공대사가 940년(고려태조23년).
이곳에서 입적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신라말에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흥법사가 언제 없어졌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시대 전기까지 절과.
진공대사탑에 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1693년(숙종19년) 이곳에 도천서원을 건립하였다가.
1871년 폐지 하였다 하며, 지금은 절터의 축대와 삼층석탑, 그리고 진공대사.
탑 귀부및 이수만이 홀로남아 있고, 절의 북동쪽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던.
진공대사부도탑은 일제시대 반출되어 경복궁에 자리잡고 있다 한다.






 
강원도에도 봄이 찾아 오는가 봅니다.

노오란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하아얀 목련이 고고한 모습으로 수줍은 듯

가슴을 드러내듯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핑크 빛 벛꽃도 꽃망울을 지우고 이제나

터뜨리려나 기다리는 듯 한 따스한 봄날에

제가 가입하던날 주인장께서 말씀하시던 원주시 호저면 용곡리에

위치한 용운사지 문화유적을 찾아 보았습니다

 

 

                         <원주시 호저면 용곡리 용운사지 석조 비로자나불좌상>

 

 

 

 

                 <원주시 호저면 용곡리 용운사지 삼층석탑>

 

문화유적답사회에 처음 가입하고 디카 첨으로 구입해서

아주작게 담은 최초 나의 작품사진 2005년 1월 22일의

서곡리 석탑재 모습입니다.  용수골입구 마을 휴양지로

매표소 입구에 의자로 사용하던 석탑재 입니다 ㅋ~~~

<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 용수골 입구 석탑재 >

 

 

 

 

 

<거꾸로 놓여져 옥개석이 보이네요>

 

 

언제 어떤 사찰에 석탑인지 모르지만 노송아래 뉘어진 모습에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실런지요, 어찌보면 쉼터의 의자로 생각하고 계시는 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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