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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묘를 추방한 주자와 '주자가례'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소장 연웅)가 15일 두번째 조선시대 벽화묘 발견 소식을 전했다.
교하노씨(交河盧氏) 문중이 강원도 원주시 동화리의 충정공(忠正公) 노회신(盧懷愼.1415-1456) 묘를 충남 청양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석실(石室) 벽면에서 청룡(靑龍)ㆍ백호(白虎)ㆍ현무(玄武)ㆍ주작(朱雀)으로 구성되는 사신도(四神圖)를 비롯한 벽화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조선시대 상장의례(喪葬儀禮) 전문가인 국립고궁박물관 정종수 관장은 "시간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런 벽화묘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노회신이 사망한 뒤 조선사회에서 석실묘가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해 16세기에는 회격묘(灰隔墓)라는 새로운 묘제(墓制)에 밀려 종적을 감췄으며 그에 따라 무덤 벽화 또한 그릴 수 없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회신 묘는 석실묘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종말기에 축조한 무덤이 되는 셈이다.
석실분이란 글자 그대로 시신을 안치하는 공간을 돌로 쌓은 무덤 양식을 말한다. 고려시대 고분 축조 판세를 완전히 장악하고, 조선 초기까지 유행한 이런 석실분에서 돌은 대체로 크고 납작하게 잘 다듬은 판돌을 이용한다.
회격묘는 지하로 묘광(墓壙.무덤 구덩이)을 파고 목관(木棺)을 안치한 다음, 느릅나무 껍질(柳皮)을 삶아 달인 물로 석회(石灰)와 황토(黃土), 세사(細沙.고운 모래)를 3:1:1 비율로 섞은 삼물(三物)로 관(棺)과 곽(槨.덧널) 주위를 다져 쌓고 봉토를 한 무덤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회격묘는 회곽분(灰槨墳)이라고도 하고 회곽묘(灰槨墓)라고도 부른다. 이런 회격묘에는 당연히 사신도와 같은 벽화를 그릴 수가 없다. 정 관장은 이런 점을 들어 "우리나라 상장의례에서 고분벽화가 사라진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회격묘의 등장과 유행에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유력한 조선왕릉 중에서 현재까지 발굴된 데는 단 한 곳도 없다. 따라서 조선시대왕릉, 혹은 그에 준하는 왕비릉이 도대체 어떤 구조이며, 어떤 부장품을 넣었는지 적어도 고고학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곳은 없는 셈이다.
이 때문에 조선왕릉 중 적어도 한두 곳은 발굴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설혹 조사가 이뤄진다 해도 "5대 문종 이전 왕릉을 발굴하지 않고서는 볼만한 건 없을 것"이라고 정 관장은 예상한다.
왜냐하면 세조 이후 조선의 왕실 혹은 사대부 무덤 양식이 석실묘에서 회격묘로 바뀐 것이 단순히 겉모양의 변화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부장품의 질과 양 또한 모두 눈에 띄게 박장(薄葬.간소한 장례)으로 변하게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 초기에 왕릉을 석실묘로 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회격묘로 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석실묘를 주장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명기(明器)나 명완(明玩) 같은 기물(부장품)을 (무덤에) 간직하기가 어렵다"는 반대 이유를 내세운다. 석실묘를 조성할 때는 적어도 왕릉 혹은 그에 준하는 무덤에는 반드시 사신도와 별자리 그림을 그려 넣는 규정이 조선 초기에는 있었다.
이에 따른다면 왕릉으로는 처음으로 회격묘로 축조한 세조 이전 무덤은 단 한 군데도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모두가 석실묘이며 그 벽면과 천장에는 각종 벽화가 발견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왜 무덤은 15세기를 고비로 석실묘에서 회격묘로 바뀌게 되었을까?
그것은 주자성리학의 보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말 안향이 도입한 주자학은 신흥왕조 조선을 건국한 주체들의 주축 사상으로 자리잡는다. 주자성리학은 단순히 이념뿐만 아니라 제도 자체에서도 새 바람을 몰고 왔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이 주자학의 제도를 집대성한 의례서로 간주됐다.
중국 본토에서는 주자가례가 주희의 저서가 아니라는 주장이 대세인 까닭에 그다지 실생활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조선에서는 그것이 주희의 직접 육성이 담긴 '경전'으로 간주돼 맹위를 떨쳤다.
이 주자가례에는 사람이 죽으면 무덤은 회격(灰隔)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이에 주목한 조선초기의 성리학자들은 줄기차게 석실묘를 대체해 다른 어떤 곳보다 왕릉부터 솔선수범해 회격묘로 만들어야 한다는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전통(석실묘)과 신문화 운동(회격묘) 사이에 일어난 충돌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다. 태종 8년, 태상왕인 태조 이성계가 죽자, 당시 집권층에서는 석실묘-회격묘의 일대 논쟁이 일어난다.
결론을 내릴 수 없던 태종 이방원은 할 수 없이 당시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종묘로 가서 점을 쳐서 어느 쪽이 좋은지를 알아보라는 명령을 내린다. 양녕이 어떤 방식으로 조상들의 뜻을 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론은 석실묘로 났다.
이런 과정들을 거친 뒤 회격묘가 대세를 점하게 되자, 그에 따른 편리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많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 중 하나가 석실묘에 비해 회격묘가 돈과 노동력이 훨씬 적게 든다는 것이었다. 물론 주자성리학의 세계를 무덤으로 구현한다는 것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 토함산 솔이파리 (솔뫼)님 블로그에서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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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위공무원 무덤벽화 발굴
원주 동화리 노회신 묘
동 단벽 쪽에서 본 북쪽 석실 내부 벽화
석실을 두 개 덧대어 조성했는데 그 덮개돌을 개봉한 모습
원주 동화리 벽화묘(노회신 묘)가 모습을 드러냈다.
벽화묘의 주인공은 교하(交河) 노씨(盧氏) 15대손인 충정공(忠正公) 노회신(1415~1456)이다. 여흥도호부사(驪興都護府使) 겸 권농병마단련부사(勸農兵馬團練副使)를 역임한 인물이다.
벽화묘는 1456년(세조 2)에 조성됐다. 방형(方形) 봉분 내에 앞트기식 돌방 두 개를 배치했다. 석실의 각 벽체는 하나의 대형 화강암석재로 이뤄져 있다. 석실의 천장은 각각 2매의 대형 판석으로 덮여 있다
석실 내부의 벽면과 천장에는 먹과 붉은색 안료 등으로 그린 4신도(四神圖)와 인물도, 성좌도 등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묘주가 안치된 북쪽의 석실과 매장 흔적이 없는 남쪽 석실의 벽화는 구성이 다르다. 묘 축조 당시 두 석실의 천장에 성좌도와 네 벽면에 4신도를 미리 그려 넣었고, 이후 묘주를 매장할 때 북쪽 석실의 벽면 하단에만 12구의 인물상을 추가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벽면에 직접 묵선으로 그린 인물의 윤곽, 손에 쥔 홀(笏), 머리에 쓴 책(幘; 쓰개의 일종)과 얼굴의채색 등으로 미뤄 벽화에 나타난 인물상은 1352년 조성된 파주 서곡리 벽화묘와 유사하게 12지신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원주 동화리 벽화묘는 2000년 발굴된 밀양 고법리 벽화묘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발견된 조선시대 벽화묘로 십이지를 표현한 인물상과 더불어 사신도를 배치하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유행한 사신도가 조선시대까지 계승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남쪽 석실의 사신도 가운데 백호의 얼굴은 다소 익살스럽게 표현돼 있어 민화의 시원적 화풍을 알 수 있게 한다"고 전했다.
지난해 노씨 문중이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석실 내 벽화가 발견됐고, 추후 정밀 발굴조사의 필요성에 따라 중원문화재연구소가 석실 재포장 등 임시 보호조치를 해왔다.
이장 시 벽화묘의 봉분 둘레석과 묘비석, 장명등, 상대석, 문인석 등 석물은 모두 충남 청양으로 옮겨갔다. 벽화가 있는 석실만 남아 있는 상태다.
문화재청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소장 연 웅)는 16일 오후 2시, 강원도 원주시 동화리 조선시대 벽화묘(노회신묘) 발굴현장에서 학계의 관계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회의를 개최하고 발굴조사 및 벽화의 보존처리를 진행할 예정이다
*****************************************<뉴시스/이민정기자 2009.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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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분이 찾아 오셔 머물었다는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貴來面)은 지명의 유래에서 알수 있듯이 통일신라말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찾아와 머물렀다 하여 귀래라는 지명이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신라말인지 고려초인지
창건되었던 암자가 있으니 이가 황산사지이다, 여기서 능선을 타고 20여분 어 오르면 거의 산정상에 미륵불이 암각되어
있는 미륵봉이 있다.
2008년 주말을 보내는 것도 산행과 유적답사의 두마리 토끼를 잡아볼겸 미륵봉을 찾아 보았다. 완만하게 오르는 양지바른
계곡소로길을 따라 오르면 낙엽밟는 소리와 함께 호젓하게 산행하며 우리 유적을 볼수 있는 산행지와 함께 약간의 암벽을
타는 스릴도 있어 어린이들과도 함께 할수 있을 정도의 가족단위 산행으로 제격인 듯 하다.
1. 산행 및 유적답사 일시 : 2008년 12월 27일 (12 :00 - 15:30)
2. 장 소 :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미륵산(해발 689m)
3. 함께한 이 : 가족과 둘이서
4. 관련자료(유적위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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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조선시대에는 치악산 기슭의 소나무도 황장목으로 분류되어 관에서 관리
하였는 듯 하다. 특히 남한강의 수운교통을 이용해 뗏못을 이용해 서울로
이동되어 궁궐을 건축하는 도편수들에게 잘 다듬어져 건축재로 활용되었으니
함부로 베어다 사용하지 못하도록 바위에다 벌목금지 구간을 표시하였는 듯 하다
치악산 산행시마다 늘상 그냥 지나치다 지난 금요일 산행시 한컷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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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답사 일시 : 2008년 5월 23일(금) 11: 30 - 11:50
2. 장 소 : 원주시 소초면 흥양리 부흥사지 석탑재
3. 누 구 와 : 업무일로 출장 나왔다 들림
4. 후 기
모처럼 하루를 얻는 기회가 되어 어제에 원주집으로 복귀 하려하니 모든일이
내 뜻대로 되지는 않는가 싶다.
지난 4월 정례신체검사 결과가 오늘 나오는데 아침 09시까지 대관령 상급기관
까지 와서 전문의 상담을 하란다.
전문의 상담이란 뻔할뻔 놀랄 놀 자 이지만 그래도 종합검진때 혈액정밀종합검사
를 의뢰하였으니 그비용을 결재하고 검진서를 받아야 한다. 이왕이면 대관령으로
가는 길인데 지난 겨울에 드라이브하였던 그 코스를 따라 비행기재 - 광하리 -
정선읍내를 거쳐 북평 나전리에서 숙암리로 하여 59번 국도를 타고 진부로 돌아
다녀오기로 마음먹고 나섰다.
왜냐하면 몇번이고 벼르고 하였지만 진부면 수항리 수항리 폐사지를 답사 하리라
별렀지만 이번에는 그곳을 둘러보고 대관령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아침 일찍 나왔지만
생각보다 구불거리는 강원도 계곡의 산길은 예상보다 어떤 지체시간이 많아 오늘도
수항리를 통과 하면서도 들리지 못하고 꿩대신 닭이라고 검진서 받고 원주로 돌아오는
길에 아여 소초면 사무소에 들려 부흥사폐사지 위치를 확인하고 잠시 찾아 보았다.
5. 답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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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통일신라시대의 북원경 신라 9주 5소경중의 하나가 바로 북원경(원주)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원주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 까지 크고 작은 사찰이 분포되어 있는 듯하다. 그중 대표적 사찰이
지정면 안창리에 있는 흥법사지 와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지와 정산리의
거돈사지 등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그외 알려지지 않은 작은 암자에 해당하는 통일신라시대의 폐사지등이 두루분포되어
태장동의 영전사지 등 사찰들이 있었고 여기의 문화재급 석탑과 부도탑 그리고
불상들이 일제 강점기때 남한강 수운 교통의 발달로 반출되는 수모를 겪은바 있다.
이러한 보물급 문화재의 영전사지 보제존자사리탑, 원주철불,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
흥법사지 진공국사 부도탑 및 석관, 거돈사지 원공국사 승묘탑, 그리고 傳 흥법사지
염거화상 부도탑등 이루 말할수 없이 싹쓸이 원주지역 문화재가 수탈당할 때
아직도 숲속에서 천년동안 잠자고 있는 석탑재가 있는 곳을 확인해 달라는 메일을 받고
오늘은 그곳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이곳은 이미 4-5년전에 답사되어졌던 곳으로
흥업면 대안1리 승안동 마을 골짜기에 석탑중에도 희귀한 팔부중상의 3층석탑재가
숲속에 잠자고 있단다.
메일로 연락주신 분은 카페를 통해 교감을 나누어 온 동국대학교 김환대 박사로 메일을 보내와
그곳을 답사하기로 하고 가족과 함께 나들이 복장에 등산화를 착용하고 김 박사가 알려온
대로 대안1리 승안동 부락 무명암자( 지역 촌노들은 본인에게 약사암이라고 일러줌)터를
찾아 나섰다. 흥업자동차 학원을 지나 대안1리 시내버스 정류장 느티나무 아래 승안동
부락입구 표지석 좌측으로 교량을 건너 1.5킬로 미터 직진하여 올라가니 천수답을 잘
정리하여 대형 자연석으로 대지를 조성하고 그 끝나는 지점은 펜션형 주택 2동이 있는 곳에
차량을 주차하고 좌측길로 150미터 정도 이동하니 공터가 나오고 여기에서 다시 오른쪽
골짜기를 건너 로프가 매어져 있는 산행로를 따라 오르니 옛날 집터인지 천수답이었던지
수평으로 계단화된 지역이 나오고 여기에서 모퉁이를 돌아 계곡물이 졸졸졸 흐르는 계곡을
따라 100여 미터 오르니 이끼낀 바위슬랩으로 물이흐는 지역에서 수미터 떨어진 곳에
숲속에 산초가시나무 숲속에 옛 페사지가 나타나니 여기가 바로 약사암터인 듯하다.
폐사지 축대를 우로 돌아 오르는 땅속에 박힌 석탑재가 여기저기 흩어져 보인다.
가장 먼저 들어 오늘 것이 석탑 상층기단 면석으로 보이는 석탑재가 반쯤은 땅속에
뭍혀 있는데 양우주와 탱주가 선명하고, 탱주 좌우로 팔부중상 2개가 뚜렷이 윤곽을
나타내고 바로 옆에도 반쯤은 땅에 뭍힌채로 상층기단 면석의 우측 우주와 가운데 탱주
가 선명히 보이는 상층기단 면석에 또다시 2개의 팔부중상이 보인다. 여기에서 1미터쯤
떨어진 곳에 다시 상층기단 면석이 보이는데 이면석은 양우주는 보이지 않고 버팀기둥인
탱주만 선명히 보이고 좌우로 팔부중상이 선명한데 좌측 팔부중산은 육안으로 보아도
합장한 듯한 모습이 아수라상으로 보여진다.
잠시 3개의 상층기단 면석이 흩어진 윗쪽에는 상층기단갑석으로 보이는 석탑재가
비스듬이 누워 있고 , 그위로는 지대석으로 보이는 길다란 다듬어지지 않은 석탑재가
보인다 , ㅎㅎㅎㅎㅎ
모처럼 폐사지 답사에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긴 처음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 앉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 폐사지를 둘러보니 좌우 명봉산 자락 능선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고
골짜기 양지바른 곳에 이 폐사지는 정동을 향하고 있고 멀리 치악산 비로봉이 시원히 보인다.
폐사지 절터 뒤쪽으로는 여러 단애의 화강암이 울타리처럼 둘러쳐져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부라리고 보아도 마애불은 뵈이지 않는다. ㅋㅋㅋ
다시 상층기단 면석 3개에 팔부중상 6개가 식별되는 폐사지 축대 바로 아래로 내려 서니
이끼낀 석탑재가 보이는데 어림짐작으로 1층석탑의 옥개석과 2층에 해당되는 옥개석이
풀숲에 가리워지고 담쟁이 넝쿨속에 이끼를 머금은채 보인다. 싸리나무를 꺽어 깨끗하게
쓸어 내리고 디카를 들이 대 본다. 옥개석(지붕돌) 주변 나무를 제치고 아랫부분 옥개 받침을
보니 희미하지만 4단 옥개 받침과 두툼한 낙수면과 우동 그리고 마지막 옥개받침 위 우동의
낙수면은 세월속에 아니면 석탑이 무너질때 그러했는지 아니면 풍화작용에 의한 것인지
훼손이 다소 심하지만 옥개받침은 비교적 선명하다.
그리고 축대 바로 아래 옥개석이 있는 곳 바로 옆에는 전에 답사한 분들이 주워서 올려
놓았는지 깨어지 청자 조각도 보인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 우물터로 짐작되는 곳도
숲속에 파뭍혀 보인다. 설레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러면 석탑을 이루는 탑신(몸돌)은
그 주변에 보이는 지 아무리 숲속을 헤집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이쯤으로 무명 약사암 석탑재 답사를 마치면서 설레이는 마음을 가라 않힐수가 없다.
원주지역에서 아직까지 팔부중상으로 만들어진 석탑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적이 없기에
더울 가슴이 두근 거린다. 몇해전에 횡성 중금리 3층석탑의 동탑과 서탑을 답사하면서
팔부중싱은 보았으나 거돈사지 3층석탑, 흥법사지 삼층석탑에도 없는 팔부중상의
석탑재가 있다는 마음에 더울 가슴 설레이는 것이다.
언젠가 문화재청 당국이나 원주지역 문화재연구 답사팀들이 발굴작업 할때 함께 하였음 하는
마음만 생긴다. 어쩌면 온전한 석탑재를 발굴 할 수있을 것 같은 생각에 더욱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 여기가 내가 애타게 찾던 염거화상 부도탑을 옮겨간 곳은 아닐까? 하는
추정속에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 설레인다.)
* 참고 자료
오늘 답사를 위해 GPS 수신기를 휴대하고 위치확인을 하였으나 위성수신이 잘 되지 못해
위치가 긴가 민가 하면서 수신된 위치를 적요한다.
* 傳 약사암 ( 대안리 승안부락)폐사지 위치
* 위도 : 북위 37도 18분 16.9초
* 경도 : 동경 127도 52분 14.4초
* WGS 좌표
52S CG 99916 , 29270
* 표고 : 295 m
* 관련 사진자료
< 대안1리 승안동 부락입구 : 왼쪽으로 1. 5킬로미터 시멘트 포장길따라 이동>
<녹색농촌 체험관 입구 : 좌측 시멘트 포장길로 1. 2 킬로미터 이동>
<펜션 선돌 왼쪽으로 경운기 길로 150미터 이동 >
<공터에서 오른쪽 계곡으로 소로길 따라 가면 개울건너 로프매어진 곳으로 오르면 옛 집터나옴>
* 이곳은 옛 조선말 천주교 박해가 심할때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숨어 들어와 부락을 이루고
농사를 지었었다고 전해짐, 승안부락에는 아직도 100년 된 천주교 공소가 있다고 함>
<폐사지에서 바라본 치악산 비로봉 : 정동 방향으로 치악산 바라보이며 좌우가 아늑한 양지 능선 사이
에 폐사지가 위치함>
< 석탑재의 상층기단면석 1 : 양우주와 가운데 버팀기둥인 탱주가 보이고 좌우에 팔부중상이 희미하게
보이네요>
<상층기단면석 2 : 좌측에는 우주가 가운데에는 버팀기둥인 탱주가 좌우측에는 팔부중상이 비교적 선명
하게 보이네요 (대충 싸리나무로 쓸어내고 찍었는데 선명하지요?)>
<상층기단면석 3 : 좌우 모서리기둥 우주는 안보이고 가운데 버팀기둥 탱주만 보이고 좌우에
팔부중상이 선명하게 보이네요 (좌측은 팔부중상중 아수라상 같아 보이는 군요 *^^* ) >
< 가장자리 부분이 깨어 졌으나 상층기단갑석으로 보이는 석탑재입니다. >
<지대석으로 보이는 화강암입니다. >
< 상층기단갑괴임석으로 보이는 잘 다듬어진 석탑재입니다. (상층기단괴임석으로 보여지는 이런
석탑재 몇개가 더 있을 것 같아요 >
< 1층 옥개석(지붕돌)으로 보이는 석탑재입니다. 주변 나무들을 발로 헤집고 아래 옥개받침을 바라보니
4단이 비교적 선명하고 2층괴임도 선명하게 보이며 우동의 낙수면 끝부분이 풍화작용에 의한
것인지 넘어지며 깨어진 것인지 훼손이 심한 것 같아요>
< 2층 옥개석(지붕돌)으로 보이는 석탑재입니다. 이끼가 심하고 담쟁이 넝쿨로 덮여있어 제거하고 한
컷 했습니다. 아랫부문 옥개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고 우동과 낙수면 끝의 훼손이 심하고 반전은
그리 심하지 않은 것 같군요? >
<최초 석탑이 세워져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지대석으로 보이는 화강암이 보이고 상층기단갑석이
비스듬이 누워져 있군요 그 아래에 상층기단 면석 3개가 위치해 있어요>
<축대 아래부분 축대높이는 대락 2미터정도 되어 보이구여 축대아래 검게 보이는 곳이 우물터로 보이는
곳이구여 바로 왼쪽편으로 1층및 2층 옥개석이 떨어져 있습니다. >
<주변에 누군가 청자파편을 올려 놓았군요 (축대 아래입니다.) 아마도 축대위에는 3층석탑이 그리고
50센티 축대위로는 불전이 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
* 이상으로 지가 폐사지에서 본 석탑재입니다. *^^*
* 기타 자료
< 답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취나물이 어찌나 많은지 한봉지 뜯고 나오는데 춘천에서 오신듯한 30대로
보이는 분 만나 상세하게 폐사지 알려주고 나오며 펜션앞에서 한컷 했습니다. 도리입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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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방불 신앙>
동서남북의 사방에 부처를 모시고 신봉한 신라인의 불국토신앙의 유형 가운데 하나,
문헌에 나타난 사방불에 관한 최고의 언급은 《삼국유사》의 사불산(四佛山)에 관한 기록이다. 이에 의하면 죽령(竹嶺) 동쪽 약 100리쯤 되는 곳에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587년
(진평왕9) 별안간 사면이 방장만 하고 사방에여래가 새겨진 대석이 하늘로부터 산꼭대기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 사방불은 홍사로 보호되어 있었는데, 왕이 이 말을 듣고 그곳에가서
예배드리고, 절을 그 바위 곁에 세운 뒤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문경의 사불산에 이 기록대로 사방불이 실재하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밖에 신라의 유물·유적 가운제 사방불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사방불이 표현된 석탑 또는 석조물로는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사면석불(四面石佛), 경주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방불, 경주경찰서 앞뜰 석탑 2기의 사방불, 경주 동천동 석탑사방불, 안강(安康) 금곡사지(金谷寺址) 사방불만은 《삼국유사》에 언급이 있어서 대강 그 성립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경덕왕이 백률사에 행차하기 위해 산 아래 이르렀을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땅을 파게 하였더니 사면에 사방불이 새겨져 있었으므로, 이에 절을 창건하고 굴불사 라 이름하였다고 전하자. 이 기록에 의한다면 굴불사지의 사방불은 742년(경덕왕 1)에서 764년 사이에 발견된 것을 알 수 있다.
사방불의 사면에 어떤 부처를 모시는가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많다. 경전을 근거로 하면 대략 여덟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①《금광명경 金光明經》 및 《관불삼매경 觀佛三昧經》에 의하면, 동방 아촉불, 남방 보상불, 서방 무량수불, 북방 천고음불을 모시게 되고 ②《대보적경 大寶積經》에 의하면 동방 집길상왕불, 남방 사자용맹분신불, 서방 마니적왕불, 북방 바라기왕불을 봉안한다. ③《대승대방광불관경 大乘大方廣佛冠經》에 의하면 동방 정수최상길상여래, 남방 무변보적여래, 서방 대광명조 여래, 북방 보개화보요길상여래를, ④《지구다라니경》에 의하면 동방 지구여래, 남방 금광취여래, 서방 실오여래, 북방 뇌음왕여래를 봉안한다.
⑤《공작왕주경 孔雀王呪經》에 근거하면 동방 약사유리광불(藥師琉璃光佛), 남방 정방불(定方佛),서방무량수불(無量壽佛),북방 칠보당불(七寶堂佛)을, ⑥《금강정유가중약출염송경 金剛頂瑜伽中略出念誦經》에 의하면 동방 아촉불, 남방 보생불, 서방아미타불, 북방 불공성취불을, ⑦《대일경 大日經》 데 1권에 의하면 동방 보당불, 남방 대근용불, 서방 무량수불, 북방 부동불을,⑧《대일경》제 5권에 의하면 동방 보당불, 남방 개부화왕불, 서방 무량수불 북방 고음불을 봉안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상에 있어서 반드시 이 유형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던 사례는 허다하다. 일본의대통17년명(大統十七年銘)사면불상(551)에 의하면, 정면에 석가모니불, 배면에 정광, 왼쪽에 미륵, 오른쪽에 보현으로 되어 있어, 사방불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석가삼존형식으로 나타나 있다. 신라의 경우《삼국유사》의 대산오만진신조에 의하면, 태자 보천과 효명이 속세를 버리고 암자를 지어 오대산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5만의 진신을 보았고, 동서남북의 사방에 각각 관음·미타·지장(地藏)·석가를 모셨다고 전한다. 이러한 유형은 신라인들의 독창적인 것으로서, 그들은 신앙대상으로서 이 4불을 도저히 제외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또한 시대가 경과됨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신앙, 특히약사여래신앙이 성행되면서 약사여래의 주처(住處)로 믿어지는 동방에 약사여래를 모시게된 것도 역시 그들이 경전의 유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신라인의 신앙에 따를 독특한 면을 개발하였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현존하는 신라의 사방불들은 모두 이러한 유형에 따라 재구성된 것으로, 동방에 약사여래, 남방에 미륵불, 서쪽에 아미타불, 북방에 석가모니불로 되어 있다. 그리고 중앙에는 보이지 않는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상징적으로 내포한 하나의 불국토를 표현한 것이 신라의 사방불이다.
또, 불굴사지의 경우 서방에는 미타삼존인 미타·관음·대세지를 조성하였고, 동방에는 약사여래 그리고 북방에는 여래상이, 남방에는 2구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동방과 서방의 경우는 그들의 지물(持物)로 보아 확실히 미타삼존과 약사여래임을 확인할 수 있지만, 남방과 북방의 경우에는 심한 마멸로 인해 거의 모습을 분간할 수 없어 남북의 조각상을 미륵과 석가로 단언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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