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하면 가산 이효석 선생의 메밀꼭 필 무렵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흥정산에서 발원한 흥정계곡의 흥정천은 봉평시내를 휘감아 돌며
금당계곡을 지나 평창강으로 흐르니 맑은 시냇가 흐르는 물은 강원 평창군의 또하나의
관광자산은 아닌지?

90연대중반에 봉평 무이리에 휘닉스파그( 리조트, 골프장)가 들어서면서 여기 저기 세워진
펜션들은 말 그대로 난개발을 초래하지는 않았는지?

아뭏튼 봉평에서는 매년 9월초면 효석문화제가 다채롭게 열려 효석문학의 밑거름이 된
봉평지역을 모처럼 찾아 보았습니다. 봉평에서 6번 국도를 타고 2킬로 횡성방향으로 가다
흥정계곡입구에서 흥정천을 따라 올라가면 허브나라 관광농원이 위치해 도심에서 찌든
우리네를 다채롭고 향긋한 허브향으로 우리를 이끄는 곳이 아닌가 해서 소개해 드립니다

*찾아 가는길
영동고속도로 면온인터체인지 - 보광 휘닉스 파크를 지나 - 봉평방면으로 계속가면
4차선 확장된 봉평외곽도로에 진입하자 마자 봉평 구도로 좌회전하여 2킬로 정도가면
흥정계곡 입구가 나오고 약 5킬로정도 아스콘으로 포장된 단차로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허브나라에 도달함
영동고속도로 장평인터체인지 - 봉평시내를 거쳐 2킬로 정도 가면 흥정계곡입구에
다다르고 계곡을 좌측에 두고 계속 올라가면 허브나라에 도달함


 

 

 

 

 

 

 

 

 

 

 

 

 

 

 

 

 

 

 

 

 

 

 

 

 

 

 

 

 

 


 
영동고속도로를 내달리다 횡성군 우천면 새말 인터체인지를 나와 42번국도를 따라
안흥찐빵으로 유명한 안흥, 평창군 방림, 평창읍을 지나 계속 내달리면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에 도달하고 그곳에서 42번 국도로 계속하여 임계, 동해 방면으로 가다보면 북평면
나전을 지나 정선군 북면 여량리 정선 아리랑의 아우라지에 이르게 된다.

정선(旌善)아리랑은 ‘아라리’라는 이름으로 정선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역, 충북지역, 경기도 동부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구비전승 되어온 민요다. 정선아리랑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인 조선시대 초기(朝鮮 初期)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가 망한 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다짐하던 선비들이 송도(松都)에서 은신 하다가 그 중 7명이 정선(지금의 남면 거칠현동 居七賢洞)으로 은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들은 지난날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忠節)을 맹세하여 일생 동안 산나물을 뜯어먹으며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입지 시절의 회상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심정(心情)을 한시(漢詩)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부르곤 했다. 이들이 지어 비통(悲痛)한 심정을 담아 부르던 시는 마을 사람들이 부르던 소리 가락에 실려 애절함을 더해갔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던 조선 후기부터 아리랑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자 명맥을 이어온 정선의 소리에 “아리랑 아리랑...”이라는 음율을 붙여 부르면서 ‘후렴구’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선아라리’ 또는 ‘정선아리랑’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사람들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民族)의 서러움과 울분을 애절한 가락에 담아 불렀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이 분단되자 반공(反共)의 분위기를 드러냈고,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아 부르기도 했다.

정선아리랑에는 시대 정신이 그대로 배어있다. 그러면서 남녀간의 사랑과 그리움, 남편에 대한 원망, 시집살이의 서러움, 고부간의 갈등, 산골마을의 지난한 삶, 떼타는 일의 고단함과 유희 등 삶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렇게 구전되어온 정선아리랑은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강원도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유산이 되었고, 체계적인 전승과 보전으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수많은 아리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아리랑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동대 만월산을 뒤로 하고, 그 만월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월정사는 사철 푸른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띤다.
그 앞으로는 맑고 시린 물에서 열목어가 헤엄치는 금강연이 또한 빼어난 경관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자연 조건이며 풍광이 빼어날뿐더러 예로부터 오만 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성지로서 신성시 되어 왔다.
그 오대산의중심 사찰로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일천사백여 년 동안, 개산조 자장율사에서부터 근대의 한암, 탄허스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름난 선지식들이 머물던 곳이려니와, 월정사는 오늘날에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이 곳 전나무 숲의 그 곧음과 푸름으로 승가의 얼을 오롯이 지키고 있는 한국 불교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월정사는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니 그 때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이었다.
자장율사는 636년에 중국 오대산으로 유학을 가고 그곳 문수사에서 기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자장율사는 “너희 나라 동북방에는 일만의 내가 상주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다시 나를 친견하라”는 게송을 문수로부터 듣고 신라에 돌아오자 마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에 들어가 임시로 초가를 짓고 머물면서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정진하였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하고 태백 정암사에 들어가 입적하게 된다.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뜻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부터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계곡에 터를 잡게 되었다.그 뒤로 유동보살 -석가모니가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할 때 연등불(燃燈佛)에게 공양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당시의 이름 - 의 화신이라고 전해지는 신효거사와 또 범일국사의 제자였던 두타승 신의 스님이 자장율사가 초가를 지었던 터에 다시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스님 이후로 오랫동안 황폐한 채로 남아 있던 이 암자는 수다사(水多寺) - 진부면 수항리에 있던 절로 지금은 절터만 남아 았다. - 의 장로 유연스님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면서 비로소 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고 그 뒤로 차츰 규모가 커졌다.
그 무렵의 월정사는 금당 뒤쪽이 바로 산인 특수한 산지가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금당 앞에 탑이 있고 그 옆에 강당 등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남북자오선(南北子午線) 위에 일직선으로 중문, 탑 ,금당, 강당 등을 세운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가람 배치와는 다르다. <월정사 안내글 퍼옴>

녹음방초와 전나무 숲, 그리고 남한강의 발원지 오대천이 사찰을 휘감아 내리는 오대산
월정사는 그야말로 한폭의 산수화가 아닐까 생각되어 집니다.
직장이 오대산 월정사와 다소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지난번 들리지 못한 아쉬움으로 월정사를 찾아 보았습니다








 

미지의세계 백룡동굴(강원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소재)입니다(그림퍼옴)

지금은 어느누구도 감히 접근할수 없는 우리지역의 천연기념물

백룡동굴은 4~5억년전에 형성된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답니다

 

<백룡동굴 종유석>

 

<동굴내 기형종유석>

 

<에그플라이 석순>

 

<동굴산호 일명 팝콘>

 

<석주 >

 

<종유석과 석주>

 

<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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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사 적멸보궁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수요일오후입니다
꼬옥 가보고 싶은 강원도 오대산이었기에 모처럼 다부진
마음으로 오대산을 찾아 보았습니다
오대산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 서면서 비로봉(1563미터)과
상왕봉을 거쳐 돌아보는 코스로 결정하고 난후 시간상
월정사와 상원사는 정상에서 내려온후 답사 하기로하고
상원사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한 후 일행들과 함께 상원사를
경유 적멸보궁까지 내달음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상원사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적멸보궁은 오대산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산맥들이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중앙에 우뚝솟아
있는 곳에 위치하여 있었으며,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
에서 기도하던 가운데 지혜의 화신인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받으신 석가모니 지신사리를 봉안한 불교의 성지라고들 말합니다
정면 3칸 측면2칸의 석가모니 정골사리를 모신 금당은 불상이
안치되어 있지 않고 불단만 조성되어 있고, 특히 석가탄신일을
며칠 앞두고 전각전면의 공간은 온갖 형상의 연등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어 적멸보궁을 뒤로 하고 한시간 가량 오르니 이윽고 오대산
정상 비로봉(1563미터)에 도착하였고 동북쪽 상왕봉(1494미터)을
돌아 북대를 거쳐 산아래로 내려오니 벌써 어두움이 시작되고
봄비가 세차게 내리더군요.
이후 최초 일행이 계획하였던 상원사 내부 문화재 답사와
월정사 경내 문화재 답사는 다음을 기약하면서 진부 톨게이트에
이르니 오후 아홉시를 훨씬 넘긴 시간이 되었으나 꼬옥 가보고
싶었던 오대산이라 하루의 피곤이 엄습하고 있으나 보람된 하루
였습니다.






 

강원도 산간지역 대설경보가 발령되던 지난 2월 16일(수요일)

줄곧 대관령에 남아 있어 쏟아지는 눈속에 한장의 사진을

담아 보았습니다.

그날 68센티가 내려 빠져나오느라고 혼쭐 났습나다

<대관령 능경봉 아래 지역 허벅지 까지 빠지는 눈땜시 겨우통로만 눈치우고 다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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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신륵사 전경>



<신륵사 전탑>  보수중에 있네요


 

신륵사 사찰 경내 동남단 강가의 넓은 바위 위에 웅장한 다층전탑 1기가 있다. 이 전탑은 벽돌을 쌓아서 만든 탑이므로 옛부터 신륵사를 가리켜 벽절이라고 한 기록들이 있다.

이 탑은 신륵사를 찾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배를 타고 강물을 오르내리는 사공에 의해서도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있음이 사실이다. 그래서 신륵사란 절 이름보다도 이 탑이 더욱 유명하게 되었고, 또 그 탑은 벽돌로 쌓아올린 벽처럼 되었으므로 절 이름까지도 그냥 벽절이라 불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의 조성 연대에 대해서 혹자는 신라 시대의 것으로 보아 왔지만 그 문양 등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탑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탑의 북쪽에는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입>(崇禎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 한 수리비가 있으므로 그 중수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이는 조선 영조 2년(서기 1726년)에 해당되므로 이때 탑을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전탑은 또한 기단부가 7층으로 되어 있되 기단자체가 체감되어있어서 전체적인 윤곽에서 상당한 높이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기단은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는 점도 기억될만하다. 이러한 기단부의 특성은 아마도 탑전체를 높게하려는 의도가 고려된 듯 싶으며 그것은 이 탑이 강가 언덕 위에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 쉽게 뜨이게 하려는 의도라 생각된다.

신라시대의 전탑이 벽돌사이의 간격이 좁은데 비하여 이 경우에는 사이가 넓게 면토(面土)를 바르고 벽돌에 연주문(蓮珠紋)을 두르고 그안에 당초문을 양각한 반원문(半圓紋)이 있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상륜부가 비교적 잘남아 있어서 벽돌로 만든 노반이 있고 그 위에 화강석으로 만든 복발과 양화,보륜,보개등이 남아 있다.

이 전탑은 중간의 수리로 인해 창건 당시의 형태를 다소 잃었다 할지라도 동대의 암반위에 높이 솟아 신륵사의 가람을 지키는 수호신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무명탑> 3층 탑신석이 안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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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시 청풍면일대는 지금 벚꽃이 만개하여

한폭의 그림 같아요

 

모처럼 일상생활에서  탈출하여 가족과 함께

제천시 청풍면일대의 과거 태조왕건세트장(예성강하구)을

찾아 보았습니다.

 

남제천 톨게이트를 빠져 나오면서 부터

상춘객들이 운집한 청풍가는 도로는 차량으로 늘어서

10킬로미터 이동하는데 시간반은 남짓 걸린것 같아요

 

다행이도 금월봉휴게소를 지나면서 태조왕건 세트장까지는

무난히 차량이 빠져 금방 도착할 수 있었어요









원주에서 서쪽으로 지정면 안창리에 위치한 흥법사지가 있다.
영봉산 아랫자락에 있는 흥법사가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연국사 영준이 932년(고려태조15년)에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이곳에 있었던 진공대사탑비에서 진공대사가 940년(고려태조23년).
이곳에서 입적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신라말에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흥법사가 언제 없어졌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시대 전기까지 절과.
진공대사탑에 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1693년(숙종19년) 이곳에 도천서원을 건립하였다가.
1871년 폐지 하였다 하며, 지금은 절터의 축대와 삼층석탑, 그리고 진공대사.
탑 귀부및 이수만이 홀로남아 있고, 절의 북동쪽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던.
진공대사부도탑은 일제시대 반출되어 경복궁에 자리잡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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