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 하면 역사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9주 5소경의
하나인 북원경이 원주이고, 라말 지방호족세력들이 군웅활거할때
북원의 양길세력하에서 궁예가 북원의 동남쪽에 위치한 석남사(지금의
원주시 신림면 석남리)에서 머무르면서 양길의 군사를 빌어 명주(지금의
강릉)를 함락시키면서 기틀을 다졌던 곳 이기도 하다
또한 원주하면 프로농구의 명문구단인 동부프로미(전 TG삼보)가 연고로
하고 있는 강원도 유일무이의 프로스포츠 연고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원주에 치악 8경의 중 하나로 손꼽히는 영원산성이 있으니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치악산 국립공원 매표소를 거쳐 비포장 오솔길로
들어서면 시야에 들어온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영원사 뒷산의 석성으로 신라 문무왕때 축성
되었다 한다. 후삼국시대부터 임진왜란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방패역할을
했다. 영원산성을 찾아가는 구불구불한 길에 수놓인 영원사 연등 행렬이
등산객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금대리 계곡을 훑고 내려오는 섬섬옥수같은
물줄기는 도회지 사람들의 충혈된 마음의 눈을 시원하게 뚫어준다.
산허리가 굽이칠 때마다 연초록 향연을 펼치는 원시림 사이로 웅장한
폭포수 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산기슭 손바닥만한 땅뙈기에 옥수수를
파종하는 노부부의 손길이 정겹게 시야에 잡힌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한구판 밀레의 만종 같은 분위기다. 도회지로 떠난 자식이나
손자가 '옥수수 하모니카'를 불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그리는 듯 괭이질이
가볍게 느껴진다.
치악산 자락을 따라 하얀 매화꽃 향기가 자욱하다. 흥겨운 계곡 물소리에
맞춰 토종다람쥐가 왈츠로 화답한다. 산자락 천년 고찰 영원사를 지나 깍아
지른 듯한 등산로 주변에는 진달래가 만발했다.
길이 2.4킬로미터의 영원산성은 1단계로 1999년부터 2002년까지 4년동안
성곽 422미터가 복원작업이 완료했다. 치밀한 고증 작업을 거쳐 산선높이를
최고 5미터에서 최저 2미터로 복원해 놓았다.
고려시대 원충갑이 원주 백성들과 함께 저군을 크게 물리친 영원산성은
임진왜란때도 원주 목사 김제갑이 주민을 이끌고 왜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다 전사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영원산성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중앙선 철길의 (구) 백척철교가 눈에 들어온다. 일제시대 주민의 피땀으로
뚫은 터널이 시야에서 멀어지면서 복잡하게 전개되는 독도 문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씁쓸한 기분으로 30만 원주 시민의 문화 젖줄인 토지 문학공원을 찾았다.
1999년 개관한 박경리 선생의 토지 문학공원든 단관택지 개발지구가 지정되면서
원주지역 지인들의 요구로 헐릴위기를 모면했다. 3000여 평의 토지문학공원은
대하소설 "토지"속의 무대가 고스란히 등장한다.
전시실에는 26년 만에 완간한 대하소설 "토지"가 1부에서 5부까지로 나뉘어 소개
되고 줄거리와 연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소설은 일제시대를 주무대로 1945년 8월15일 주인공 "서희"에게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집필도 광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69년8월15일 집필을 시작한 " 박 경리" 선생은
94년 광복절에 탈고 했다.
전시실 전망대에서 서면 문학공원이 한눈에 들오온다. 박경리 선생 옛집을 중심으로
경남 하동 평사리 마당에서 섬진강 나루터, 홍이동산, 용두레벌 간도 용정까지 3000리가
무대로 한눈에 펼쳐진다.
16년동안 박경리 선생이 살면서 "토지"를 완성한 옛집은 토지 4, 5부를 탈고한 장소다.
현재에도 집필실과 살림살이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특히 손수 가꾼 텃밭과 정원을
재구성해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집앞 두 평 남짓한 연못도 직접 만들었다.
창문 앞에는 경남 통영에서 가져 왔다는 오죽이 그림처럼 우아한 자태를 뽑내고 있다.
마당의 느티나무와 텃밭도 박경리 선생의 숨결이 느껴진다.( 기행일부 퍼온글)